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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476회 탄신일(4.28.)을 맞아 일심(一心)의 국난극복 위업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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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476회 탄신일(4.28.)을 맞아 일심(一心)의 국난극복 위업을 기린다.
  • 교육3.0뉴스
  • 승인 2021.04.2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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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 효성이 지극하고 부하를 아끼는 마음, 지극한 충성심과 숭고한 인격,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는 마음 「自主 自立 獨立(자주 자립 독립)」, 새롭게 생각하고 창조하는 태도「創意 創造(창의 창조)」, 용감히 싸우고 반드시 이기는 정신 「敢鬪 必勝(감투 필승)」,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 타인보다 본인에게 더 엄격하고 사사로움을 돌보지 않은 청렴결백한 생활 태도와 공정 무사함과 수용(受容)의 마음,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의연한 기상, 소통과 책임 완수의 글로벌 리더(Global Leader), 참 인간 의범(儀範)으로 내 몸 바쳐 나라 구한 신망국활(身亡 國活)의 귀감으로 남는 성웅(聖雄)이다.

충무공은 거북선을 비롯한 여러 병기와 갖가지 새로운 병법을 창안하였고, 참담한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과감히 승리를 쟁취하였던 창조와 개척의 뜨거운 호국 정신의 이 끔이 교훈이 아닐까.
홍순철 「서울 중랑 교육발전협의회장,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사단법인 좋은 교육협의회 이사 겸 회장, 세종로 국정 포럼 서울 중랑 교육발전위원장,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주간, 한국문예 등단 수필가, 전(前) 신현고등학교 교장」
홍순철 「서울 중랑 교육발전협의회장,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사단법인 좋은 교육협의회 이사 겸 회장, 세종로 국정 포럼 서울 중랑 교육발전위원장,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주간, 한국문예 등단 수필가, 전(前) 신현고등학교 교장」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적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한산도가(閑山島歌)는 충무공 이순신이 적은 난중일기(亂中日記)의 한 구절로 이순신이 전쟁터에서 나라를 걱정하면서 지은 진중 시(陣中詩)이며,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읊은 우국 시(憂國詩)다. 이 구절을 보면 임진왜란 때 한산 섬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나라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며 구국의 열정을 불태우던 충무공의 우국충정이 저절로 가슴에 와 닿는다. 겉으로는 강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두려움과 외로움을 시와 일기로 달랬을 뒷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이 마음을 대신한 소리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일성호가(一聲胡笳) 소리다. 일성호가는 태평소(太平簫) 소리를 일컫는다. 

 경남 통영 한산도의 제승당(制勝堂)은 삼도 수군 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던 조선 수군의 근거지였으며 성웅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긴 한산대첩(閑山大捷) 승전지로 유명한 곳이다. 충무공이 전라 좌수사 겸 삼도의 수군통제사로서 작전지휘 하던 운주당이란 건물 자리에 영조 때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이름 붙인 곳으로 경내에는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한산정, 수루 등이 있다. 본래 이순신의 서재인 운주당(運籌堂)은 지혜로 계책을 세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난중일기에도 동론화계(同論畫計, 모든 일을 같이 의론하고 계획을 세운다), 백이주책(百爾籌策, 온갖 방책을 의논했다.), 일야모약(日夜謀約, 밤낮으로 의론하고 약속한다.)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성공의 관건은 글로벌 리더로서의 조직원들과의 소통을 이르는 말로 물은 지형에 따라 흐르는 방향이 결정되고 군대는 적군의 내부 사정 변화에 따른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여야 승리할 수 있듯이 소통즉생 불통즉사(疏通卽生 不通卽死)의 교훈을 남긴다. 

 4.28.은 제476회 「충무공 이순신 탄신 일」이다. 이날은 1545.4.28.(음력 3.8. 인종원년)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날을 기념해서 그의 애국 위훈과 숭고한 충의(忠義)를 길이 전승하고, 민족 자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이다.                 

 이날의 유래는 1967.1.6. 제정한 충무공 탄신 기념일에 관한 건(문교부령 제179호)에 4.28.을 충무공탄신기념일로 정한다고 고시하여 달력에 충무공탄신일로 표기되었다. 이에 충무공탄신일이 이순신 장군을 호칭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므로 서울특별시 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에서 달력 인쇄할 때 이충무공탄신일로 표기해 달라는 협조 요청을 한 기록이 있다「국가법령정보센터 | 법령 >본문 - 충무공탄신기념일에관한건 (law.go.kr), 게시판 >공지사항 >인쇄물(달력) 표기에 관한 협조요청 (spiic.or.kr) ,

1970.4.16. 충무공 탄신 기념일에 관한 규정(문화공보부령 제16호)으로 전부 개정되었다. 1973.3.30.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약칭: 기념일규정, 대통령령 제6615호)에 의거 충무공탄신일이 법정기념일에 포함되었고, 2013.6.17. 충무공탄신일 →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로 명칭 변경(대통령령 제24609호)되었다. 

 조선 중기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은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마르내 골(현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17.4.28.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팀이 많은 역사학자의 고증을 통해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로 추정 중인 서울시 중구 인현동 1가 31-2의 개인 빌딩에 가로 50cm, 세로 60cm 크기의 주물 동판으로 제작한 안내판을 부착했다고 전한다. 현재 명보아트홀 앞에는 1985년 서울특별시에서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한 차원에서 이순신 생가터라는 명칭의 기념 표지석이 놓여있다. 옛 건천동은 현재의 명보아트홀 일대와 인현동 1가까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곳이 현재의 인현동 1가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라는 명칭을 짓게 되었다. 또한 옛 건천동 뿐만 아니라 을지로 훈련원 공원에도 이순신이 별과 시험을 치르다 실수로 낙마하여 왼쪽 다리를 다친 곳이라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정랑 이분이 저술하고 구보 박태원이 번역하여 1948.5.20.에 을유문화사가 발행한 조선 시대 무신 이순신의 행적·일화·인품·전언(傳言) 등을 망라하여 1795년에 간행한 유고 전집(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인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서 그의 탄생지에 관한 기록이 있다(金永上 ‘世宗大王과 李忠武公의 誕生地’《鄕土 서울》제3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58.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충무공 탄실일 맞아 `이순신 생가터` 안내판 설치되다 : 부산의 대표 정론지, 국제신문 (kookje.co.kr) 2017.4.28.,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등」.

△ 임진일기 속 이순신의 서압(署押) 일심(一心) 연습 부분 / 서압은 공적인 자필 서명으로 수결이라고도 불린다. ‘一心’은 이순신 고유의 서압 문구는 아니며 조선 시대 관인들이 관용적으로 사용하되 개성적인 필획으로 구사했던 서압 문구이다(전장의 기록에서 세계의 기록으로 난중일기(亂中日記), 발행인 장경복, 발행처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2013.7.1.에서 따옴.
△ 임진일기 속 이순신의 서압(署押) 일심(一心) 연습 부분 / 서압은 공적인 자필 서명으로 수결이라고도 불린다. ‘一心’은 이순신 고유의 서압 문구는 아니며 조선 시대 관인들이 관용적으로 사용하되 개성적인 필획으로 구사했던 서압 문구이다(전장의 기록에서 세계의 기록으로 난중일기(亂中日記), 발행인 장경복, 발행처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2013.7.1.에서 따옴.

  그는 1453년 8살 전후 충남 아산 백암리(白岩里)로 이사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퇴계의 제자이며 이순신과 권율과 같은 인재를 등용,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던 명재상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1969.11.7. 국보 제132호 지정, 한국국학진흥원 관리)에서 그는 이순신을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무예에 뛰어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닌 사람이었고 형들로부터 학문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칠 만큼 온정도 넘친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한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이순신은 28살 되던 1972년 8월 무인선발시험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실격하였고, 4년 와신상담(臥薪嘗膽) 32살 때인 1576년(선조 9) 2월 식년 무과, 병과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권지훈련원봉사무관(武官)이 되어 처음 벼슬을 시작했다. 36살인 1580년 6월 전남 고흥 발포(鉢浦)의 수군 지휘관인 만호(萬戶)가 되었고, 45살인 1589년 2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의 군관이 된다(그해 2월 유성룡 병조판서가 됨). 12월 정읍현감으로 덕치 선정을 한다. 

 47살 때인 1591.2.13. 남해의 4개 함대 가운데 한 함대의 사령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水使,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어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왜적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그는 48살인 임진왜란 직전인 1592(선조 25년).4.12. 당대무비(當代無比)의 전선(戰船)인 거북선을 건조(建造)하였다. 여수 선소 유적(麗水 船所遺蹟, 사적 제392호(1995.04.20. 지정)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거북선을 뛰어난 조선 기술을 지닌 나대용과 함께 처음 만들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문화재청 (cha.go.kr), 여수관광문화 >여행·체험 >이순신코스 >충무공의 발자취 (yeosu.go.kr), 여수 선소유적지, 조선의 돌격함 거북선을 건조..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거북선은 수백 척의 왜선을 무찌른 과학의 결정체이다. 

필과즉생(必科則生,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살 것이다.)의 정신으로 거북선을 생각한다. 거북선에 사용한 나무못은 바닷물에 닿으면 팽창하며 배 전체를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이 사용한 쇠못은 바닷물에 닿으면 나무와 팽창률이 달라 배가 쉽게 파손된다고 한다「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필사즉생..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한국과학창의재단」. 

2016.4.6.(현지시간) 미국해군연구소(USNI)는 USNI 뉴스를 통해 국 관계자와 군사전문가, 일반 독자 2만 6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함은 무엇입니까?」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Survey Results: What is The Greatest Warship of All Time?)했고,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도 당당하게 세계 7대 명품 군함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1900년대 이후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의 항공모함이나 세계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 등 근‧현대적인 군함들과 1500년대에 제작된 거북선이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USNI뉴스는 거북선을 ‘볼록한 덮개로 선체를 덮어 거북 등껍질과 비슷한 모양이었고 적군이 선내로의 침투가 사실상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속도가 빠르고 기동성도 좋았다’고 설명했다. 또 ‘뱃머리에 부착된 용머리 모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강력한 심리적인 무기였다’고 덧붙였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해상 전투에서 ‘수치상 우세했던 일본의 침략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당시 해전의 군사적 영향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며 거북선을 높게 평가했다「Survey Results: What is The Greatest Warship of All Time? - USNI News, ▒ 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navy.ac.kr) 거북선」

 

 1980년 해군에서 임진왜란 당시 원형을 그대로 복원한 거북선을 최초로 건조하였고 1986년 4월 기아산업에서 거북함을 건조하여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한강공원 이촌 지구에 위치한 거북선 나루터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전함 거북선을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제작, 전시되어 있다. 이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과 해양 진취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서울시에서 건조하여 1990년 10월 제42주년 국군의 날을 기하여 한민족의 젖줄인 한강에 진수, 취항한 것이다. 거북선나루터 안에는 충무공의 유품을 비롯한 해전 상황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실이 마련되어 있다.  

 최근 해군사관학교(해사)는 2021.4.11.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후예인 대한민국 해군과 해군사관생도들이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국민들 역시 충무공 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임진왜란 당시 모습과 유사한 거북선을 건조하기로 했다. 현재 해사가 운용 중인 거북선은 지난 1999년 국내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재건조한 것이다. 하지만 노후 됐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200년 후의 기록인「이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귀선도를 기본으로 통제영 귀선도(龜船圖)를 참고한 조선 후기 거북선과 유사해 임진왜란 당시와는 규모와 형태가 차이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에 해사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모습과 가장 유사한 거북선으로 건조하기 위해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단과 자문회의와 학술 세미나를 거쳐 상세설계를 마쳤다. 역사, 설계, 건조, 무기, 복식 분야 16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은 기존 역사 기록의 부재로 논란이 됐던 부분까지 심층적으로 분석해 반영했다. 임진왜란기 거북선은 길이 24.3m, 중량 107t 규모로 국내산 소나무를 사용한다. 머리인 용두는 현자총통을 발사할 수 있는 총혈이 있는 형태를 채택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 올린 장계인 당포파왜병장에 용두에서 현자 철환을 쏘았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북선을 덮고 있는 개판은 나무로 이뤄진다. 이는 거북선이 철갑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철갑선이 아니었다는 학계의 중론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타의 보조 및 추진력 증진 역할을 하는 긴 꼬리인 장미가 설치된다. 이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함께 참전했던 조카 이분이 남긴 「행록」중 ‘선미에는 거북꼬리가 있고, 꼬리 밑에 총혈이 있다.’고 한 부분과 지난 1633년 경기수사 최진립이 남긴 「해유서」중 거북꼬리에 해당하는 장미에 대한 기록이 있는 점을 참고한 것이다. 해사는 4월부터 임진왜란기 거북선 건조를 시작해 오는 2022년 12월 완료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여 건조되면 국민에게 실물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국방일보 모바일 (dema.mil.kr) 2021.4.11.」.

 

 당시 유명한 전투로는 첫 승리를 거둔 옥포 해전(1592.5.7.), 합포(1592.5.7.), 적진포(1592.5.8.),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사천(1592.5.29.), 당포(1592.6.2.), 당항포(1차: 1592.6.5. 2차: 1594.3.4.~4,3.), 율포(1592.6.7.), 견내량(1592.7.8.), 한산도(1592.7.8.), 안골포(1592.7.10.),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을 공격해 100여 척을 격파한 부산포 해전(1592.9.1.), 웅포(1593.3.3.~4,3.), 장문포(1594.9.29.~10,4.), 칠천량(1596.7.16.~10,4.), 명량(1597.9.16.~10,4,), 노량(1598.11.18.~11,19,) 등 여러 해전에서 선봉 돌격 선으로 출전하여 많은 일본 선을 격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같이 이룬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과 큰 공을 인정하여 49살인 1593(선조 26).8.1. 그를 연합 함대 사령관 즉, 전라 · 경상 · 충청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한다.

 

1592.(선조 25).5.7.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 해전(玉浦)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왜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을 앞두고, 경상 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격에 대한 세부사항을 지시 후 공포심과 전쟁 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질 수 있도록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침착하고 무겁기를 산과같이 하라.” 하고 한 말이다. 이는 첫 해전을 앞둔 조선 수군 장수들에게 신중하고 침착하게 전투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이다(옥포파왜병장, 5월 10일 기록).

1594.4.23. 당항포 대첩을 이룬 경남 고성군의 당항포는 왜군이 몰래 염탐하여 만든 지도에 의지하여 침범했다가 왜선 31척이 전멸한 참사를 당한 곳인데, 일본 간첩이 만든 지도를 고친 기생 월이의 이야기가 고성군 일대에 전해지고 있다. 고성군에서는 이순신의 업적을 기리는 당항포대첩축제와 기생 월이의 애국정신을 추모하는 월이 축제를 열고 있다전시관 >당항포해전관 - 고성군 당항포관광지 (goseong.go.kr)」.

 53살인 1597.3.4. 모함과 당쟁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직위에서 해임되고 출옥 후 백의종군한다. 그해 1.14.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2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이순신은 4.1. 감옥에서 나온다. 한편 이순신이 없는 조선 함대는 1597.7.18. 원균이 이끄는 삼도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함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원균 등이 전사한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연합함대는 궤멸하였다. 

위기에 처한 조정은 7.23.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그는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라.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선조의 밀지에 수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수군의 존속과 가치, 효용론을 들어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한다.

“임진년부터 5년, 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도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이충무공전서」, 이분, 이충무공행록 「행록」,

 정유재란 당시 1597.9.16. 53살 때인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13척의 조선 함대는 133척으로 구성된 일본의 대함대를 물살이 빠르고 물길이 좁은 명량(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하고 효과적으로 화력을 활용해 적선을 함몰 시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則死 必死則生) 병법에 이르기를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이다. 명랑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597.9.15.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 의지 분발과 결사 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말이다.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말이 아닐까(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

△ 충무공의 사인인 ‘일심’을 새긴 컵(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 충무공의 사인인 ‘일심’을 새긴 컵(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그는 명량해전에서 1척의 배를 더 추가하여,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다. 

 임진왜란「1592년(선조 25).4.13.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 싸움」막바지인 1598(선조 31).11.19(양력 12월 16일) 54살 때 이순신은 퇴각하는 일본 함대와 노량 앞바다에서 결전을 벌여 대승리를 거둔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그 또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戰死)한다. 경남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관음포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나간 이락산 초입의 이락사(李落祠) 입구 옆에 우뚝 솟은 큰 비석에「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愼勿言我死)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라는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충무공이 남긴 유언은 그의 결사보국 정신이 읽힌다(이충무공행록 기록, 유성룡의 징비록,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 명언 | 이충무공 소개 | 군항제 | 축제 | 창원시 분야별 포털 (changwon.go.kr), 해양수산부 - [해양역사 인물] 조선을 구한 영웅 이순신 (mof.go.kr)」.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사적 제112호)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8에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글에도 재주가 있어 임진왜란 7년 동안 싸움터에서 직접 쓴「난중일기」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성품이나 국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 군사에 대한 비밀계책, 친지·부하·내외요인들과 내왕한 내용, 부하들에 대한 상벌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 정치·군사에 관한 전체 역사를 연구하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1792.8.19. 정조가 이충무공전서 편찬을 지시하였고 1795.(정조 19년).9.14.에 정조의 명령으로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를 규장각에서 편찬·간행함으로써 그를 기리는 수준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9월 14일 임술 1번째 기사에는 「......이에 앞서 내각에 명하여 이순신의 옛날 행적 및 유고(遺稿)를 모아 한 책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와서 편찬해 올리니, 하교하기를, “이번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편집할 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심을 표명했었으니 이제 인쇄할 때에 와서도 역시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마땅하다. 이제 내탕(內帑)의 돈 5백 민(緡)과 어영(御營)의 돈 5백 민(緡)을 내려주어 책을 인쇄하는 비용을 보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조선왕조실록 (history.go.kr) 」.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62.12.20.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를 국보 제76호로 지정하였고, 현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문화재청 통합검색 (cha.go.kr),『난중일기』 - 디지털아산문화대전 (grandculture.net)」.

 난중일기는 2013.6.18. 새마을운동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속에는 낙서인 듯 아닌 듯 흥미로운 의문의 흔적이 있다. 그 글자는 이순신이 사인을 연습한 흔적이다「수결 (nts.go.kr) 국세청 조세박물관」.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현양(顯揚) 사업은 그의 사후부터 꾸준히 전개됐다. 이순신에게 높은 관직을 부여하거나, 이종(彛鐘 옛날 공신의 이름을 새겨 보관하여 오래 전한 일종의 제기)에 새겨지고, 사당을 건축하고 성역화 및 유적 정화(淨化) 사업, 기념 축제 추진, 충무공 이순신상(동상, 석상) 건립, (표준) 영정 지정, 공원 조성 및 충무(이순신) 공원 이름 부여, 문화재 지정, 유허비 및 비각 건립, 전시관과 교육관 마련, 강의와 세미나 개최, 책자를 발간하는 등의 방식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밝게 빛나고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민족적 영웅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며 다수의 전기(傳記)가 발간됐다. 대표적으로 단재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이라는 역사소설을 연재했고, 소설가 최찬식은 1925년에「리순신 실긔(李舜臣 實記)」를 저술「1925년 경성 박문서관 발행본의 근대 영인본 이순신실기(李舜臣實記)」 , 1967년    이은상의 난중일기, 1973년 조성도의 임진장초 번역이 이루어졌다. 

 1643(인조 21년).3.28. 이순신에게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1601년(선조 34년) 여수 좌수영 옛터에 나라를 위한 이순신 등 세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의정 이항복이 임금께 청하여 통제사 이시언이 충민사(사적 제381호, 1993.6.1. 지정)를 세우고 현판을 하사한다. 사당 중 사액 1호이다. 1663년 7월 현종이 노량에 충렬사 현판, 1689년 정읍에 충렬사(忠烈祠) 편액을 내렸다. 또한 현충사(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는 충무공의 애국 충렬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1706년(숙종 32년)에는 아산 지역 유림의 상소로 지어져 1707년 숙종이 현충사란 현판을 내렸다.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국보 제76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cha.go.kr)」.

경남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 있는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사적 제232호, 1973.6.11.)은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른다. 그 후 1832.(순조 32년)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를 경내에 걸었다. 묘비각과 유허비, 사적비 등이 있다.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 →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2011.7.28. 고시).

 이충무공전몰 유허비는 바로 충무공이 순국 「1598년(선조 31년) 11.19.」한 관음포(觀音浦)의 터 위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충무공의 공적을 찬양하고 관음포에 유허비를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 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조동원 편저, 『한국 금석문 대계』 4,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5.). 관음포 유허비의 앞면에는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贈議政府領義政諡忠武李公舜臣遺墟碑)” 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번역문이 있다. 

  이순신의 드높고 큰 공적과 충성은 윤음(倫音, 임금님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에서 찬양되었고, 염완(琰琬, 나라의 보물 그릇)에 밝게 빛나고, 태상(太常, 예조 소속의 시호를 내려주는 관직을 말하고, 맹부는 공신의 훈공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하던 관아)에 기록이 있고, 그 사적이 맹부(盟府, 서약의 서류를 넣어두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 학사대부(學士大夫)가 기리고 서술하는 가운데에 빛나고 빛나니, 진실로 다시 더 군소리를 첨가할 필요가 없다. 

그는 벽촌의 나약하기만 한 군사로써 용기 넘치는 백만의 일본군을 맞아 굳세게 나라를 지켜내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장수양(안녹산의 난을 막은 당나라 장수)과 같고, 물결을 가로질러 물 흐름을 끊고서 기발한 계책으로 싸워서 저 흉악한 무리를 패배 시켜 모두 불타 없어지게 한 것은 주공 근(오나라 주유의 이름, 적벽대전에서 조조 함대를 불 공격으로 대파함.)과 같다. 적은 군사로써 많은 군사를 쳐서 앞으로 나아가자, 굳세게 항거하는 일본군이 없고, 위세만으로도 적이 떨며 복종하게 하여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일본군이 소문만 듣고도 도망치게 한 것은 악무목(남송의 충신, 금나라 군대를 물리침)과 같다. 천하를 다시 편안하게 만들어 위태로움을 돌려 태평하게 안정시켜 그 한 몸에 종묘와 국가의 운명이 달린 것은 곽분양(당의 명장 현종 때 안사의 난을 평정함), 이서평(당의 명장, 덕종 때 주비의 난을 평정함)과 같다. 정성을 펴고 공정함을 펴서 몸이 다하도록 힘쓰고 애써서 덕과 위엄이 함께 빛나, 농민과 병졸까지도 모두 감복(感服)시키고 마침내는 몸 바쳐 싸울 작정을 한 것은 오직 제갈무후(제갈량 촉한의 승상)만이 그와 같다. 무후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가 죽은 뒤엔 한나라의 종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恩德)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이 없을 것이다. 다만, 공의 공적은 사실 바다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호남의 수사로서 무공을 처음으로 떨친 데 대해서는 좌수영 대첩비가 있고, 벽파의 싸움에서 적의 총칼을 막아 기호지방(경기도 및 황해도 남부와 충청남도 북부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길이 안정시킨 데 대해서는 명량대첩비가 있으며, 삼도 통제영에 있으면서 깃대를 세우고 병영을 건조하여 앉아서 평화와 안정을 거둔 데 대해서는 고성 충렬사비가 있고, 순천의 충민사, 남해의 충렬사(노량충렬사), 고금도의 탄보 묘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적이 드러나게 새겨져 있어서 영원히 그 공적을 알리고 있다충무공 이순신 (gyeongnam.go.kr) 경상남도 창원시,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cha.go.kr)

 1603.(선조 36년) 이순신의 부하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여수 타루비(麗水 墮淚碑, 보물 제1288호, 1998.12.4. 지정)가 있다. 1793년 정조는 “충무공처럼 충성심이 뛰어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음에도 그 사후에 아직 영의정으로 추증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라며 1793.7.21.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하는 교지를 내렸고, 1794.10.4.에는 친히 비문(碑文)을 내려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를 세웠다. 

1693년 이충무공 묘소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다. 아울러 숙종 때 고인이 된 신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인 선정(先正)으로 불리면서 최고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1603.(선조 36년) 이순신의 부하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여수 타루비(麗水 墮淚碑, 보물 제1288호, 1998.12.4. 지정)가 있다. 1968년 4월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주관하여 서울 광화문에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충무공이순신상(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  

1932.6.5.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중심이 되어 현충사를 중건하고 영전봉안식을 가졌다.  

 충무공이 화폐에 제일 처음 등장한 것은 1958년 50환 지폐 뒷면이었다. 당시에는 동상 형태의 이미지로 등장했었다. 지금은 안 쓰이는 지폐인 500원짜리 지폐는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지폐 초상이었다. 이 지폐의 전면에는 이순신의 초상과 거북선의 모습이 도안되어 있고, 뒷면에는 현충사라는 이순신의 사당이 새겨져 있다. 5원짜리 동전에도 거북선이 도안되었었다「거북선-나무위키, 한국조폐공사 쇼핑몰 (koreamint.com) 구권 이순신 오백 원」.

 이순신은 왜 100원 동전에 들어갔을까. 한국조폐공사에 따르면 △ 문(武)보다 문(文)을 중시한 조선 시대, △가장 많이 쓰이는 돈 백 원이라 이순신을 채택했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의 경우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25센트와 1달러라는 작은 단위의 동전에 새겨져 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동전에 자신의 초상화를 새겨 달라고 부탁했듯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서 꼭 고액권의 주인공이 되는 건 아니다[카드뉴스] 이순신 장군은 왜 100원 동전에 들어갔을까? (tistory.com).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cha.go.kr),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navy.ac.kr), 이충무공전서 | 과학문화포털 사이언스올 (scienceall.com),, 국가법령정보센터 | 법령 >본문 - 충무공탄신기념일에관한규정 (law.go.kr), 이순신(李舜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네이버 백과사전, 이순신[李舜臣,1545~1598] | 두피디아 (doopedia.co.kr), 국가기록원>검색결과 (archives.go.kr),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충무공탄신일 - 표제어 - 한국세시풍속사전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nfm.go.kr), 사단법인 서울여해재단 (seoulyeohae.com)[국내여행]역사가 숨 쉬는 통영 시간여행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문화체육관광부 누리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문화체육관광부 (mcst.go.kr) 축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업적 | 이충무공 소개 | 군항제 | 축제 | 창원시 분야별 포털 (changwon.go.kr), 재미있는 초등역사 <우리역사넷 (history.go.kr) 이순신, 조선의 바다를 지켜내다,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history.go.kr) 이순신[李舜臣]백전백승, 백의종군, 행정안전부> 업무안내> 장차관직속> 의정관> 국경일·기념일 >기념일내용 (mois.go.kr), 기념일과 기록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 (archives.go.kr) 국가기록원,  창의인성교육넷(크레존) - 4월 28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crezone.net)기념일 >법정기념일 >충무공탄신일 (archives.go.kr), [과학이달력]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 과학문화포털 사이언스올 (scienceall.com), 정읍 충무공원 - 충렬사와 충혼탑이 더 뜻깊게..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정읍 충무공원과 충열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제승당안내도 | 제승당관리사무소 (gyeongnam.go.kr), 난중일기, 홍정욱 펴냄, 사단법인 올재 출간, 2011.11.4.」.

충무공 이순신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구국(救國)의 영웅이다

수많은 기념일 중 유일하게 특정 인물이 태어난 날을 법정기념일로 정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한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을 도와 왜적과 싸웠던 승려들의 근거지였다는 여수시 돌산읍에 있는 향일암(向日庵) 오고 가는 입구에는 불언(不言) 교훈이 있다.  ‘남의 잘못을 보려 애쓰지 말고 / 큰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 남의 말에 평정을 잃지 말고 / 또 나쁜 말은 입에 담지 말라.’ 

  어느 작가가 남긴 “길이 있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라는 글이 또 생각난다. “몸으로 걷기보다 마음으로 걸어 보세요. 이제 당신만의 길이 시작됩니다.”라는 글귀를 떠 올려본다.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 발자취, 그가 걷고자 했던 길은 정녕 구국의 일념으로 담아온 일심(一心, 한마음)으로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의 행복이 더 있는 애국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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