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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주년 3.1절, 독립운동가의 애국의 숭고한 숨결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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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주년 3.1절, 독립운동가의 애국의 숭고한 숨결을 느낀다.
  • 교육3.0뉴스
  • 승인 2021.02.2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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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답시다. 각 가정에서는 3.1.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태극기를 답니다(행정안전부).

3·1 운동의 상징 유관순,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만해 한용운, 오세창, 박희도 등과 다시금 부르고 싶은 독립운동가로 등록문화재인 방정환·문일평·오기만·서광조·서동일·오재영·유상규 등이 있는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과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한이 겹겹이 서려 있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등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쳐 온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설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순철 「서울 중랑 교육발전협의회장,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사단법인 좋은 교육협의회 이사 겸 회장, 세종로 국정 포럼 서울 중랑 교육발전위원장,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주간, 전(前) 신현고등학교 교장」
홍순철 「서울 중랑 교육발전협의회장,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사단법인 좋은 교육협의회 이사 겸 회장, 세종로 국정 포럼 서울 중랑 교육발전위원장,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주간, 전(前) 신현고등학교 교장」

3월 1일은 제102주년 3·1절이다. 이날을 맞아 그 유래와 의미를 알아보면 어떨까.

 3·1절은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였던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발전 시켜 민족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제정한 국경일”이다.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을 계승하고.”라고 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원천이 바로 3·1운동에 있음을 명기하고 있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항일만세운동으로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3.1 운동과 그 정신을 기념하는 3.1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1919.4.11.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12월부터 국무회의와 임시의정원의 논의를 거쳐 1920년 3.1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국경일 명칭은 ‘독립선언일’로 정하였다. 다음 해에 3.1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이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국무원과 임시의정원 의원 등이 참석한 기념식에서 안창호는 “과거 일 년간 일인은 이날을 무효로 하려 하였고, 우리는 이날을 유효하게 하려 싸웠소. 일인의 최대 문제는 이날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고,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외다…… 그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작년 3월 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말자 함이요.” 하고 연설했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상해 곳곳의 한인들은 상점에 태극기를 걸어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고 축하하였다.

이후에도 3월 1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과 광복을 열망하는 온 민족의 가장 큰 기념일이었으며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미주 등 해외동포들도 다양한 행사를 통해 이날을 기념하며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독립선언일’, ‘3.1절’이라 부르며 기미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전통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세계 곳곳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10.1. 법률 제53호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약칭: 국경일법)"을 제정·공포되면서 3월 1일은 ‘3ㆍ1절’이라는 명칭으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 되었다. 3.1절은 국경일로 "대한민국국기법"(법률)에서 전 국민이 국기를 다는 날로 정하고 있으며,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약칭: 관공서공휴일규정)"(대통령령)에 따른 공휴일이다.

 우리 선조들이 보여준 나라 사랑과 독립투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3.1절에는 가정마다 태극기를 달아 3.1절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자세한 내용은 행정안전부 국가상징>국기(태극기) >국기의 게양 (정안전부/국기의 게양)(행정안전부/국가의 상징)참고〕.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 동포야 이날을 기리 빛내자” 1946년 위당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3.1절 노래’ 이다. 1950.2.25. 총무처 장관은 이 ‘3.1절 노래’를 입법, 사법, 행정부에 송부하였는데 이를 통해 3.1절 공식기념행사 노래로 지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동아일보, 1950. 02. 26.).

3·1 운동 또는 3·1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점령당한 후 한국의 의병과 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1919.1.21. 새벽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였다.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곧 조선  독립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하라는 일본 정부의 강제적 요청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또는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문을 보내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인 혹은 친일파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간 것이다. 고종의 죽음은 우리나라 항일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에는 대한제국의 1대 황제였던 고종과 비 명성황후 민 씨를 합장한 무덤인 홍릉(사적 제207호)이 있다「국립고궁박물관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2019.03.01 ~ 2019.03.31. 특별전시」.

그때, 항일 학생 독립운동의 최고봉으로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조선 청년독립단」 명의로 최팔용·송계백·김도연·김상덕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고, 재일 한인 유학생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2.8. 일제의 심장부인 동경(도쿄) 한복판에서 조국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2·8 독립선언’사건이 일어난다. 이 선언을 통해 국내 3·1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1920년대 청년·학생의 항일투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1919년 3월 조선 민족대표 33인이 공표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우측면에 '선언서(宣言書)'를 시작으로, 독립의 의지와 당위성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의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내용이 인쇄되어 있음. 끝부분에 공약 3장(公約 三章)과 조선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 수록됨. 첫 문장에서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에서 ‘조선(朝鮮)’이 ‘선조(鮮朝)’로 글자가 바뀌어 있는데, 조판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라고 함. 연도는 단기 4052년 3월로 표기,크기는 가로 : 46.3, 세로 : 25.8(△자료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http://www.much.go.kr/museum/nrms/view.do?idnbr=PS01002025001-015678-00000#none)
1919년 3월 조선 민족대표 33인이 공표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우측면에 '선언서(宣言書)'를 시작으로, 독립의 의지와 당위성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의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내용이 인쇄되어 있음. 끝부분에 공약 3장(公約 三章)과 조선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 수록됨. 첫 문장에서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에서 ‘조선(朝鮮)’이 ‘선조(鮮朝)’로 글자가 바뀌어 있는데, 조판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라고 함. 연도는 단기 4052년 3월로 표기,크기는 가로 : 46.3, 세로 : 25.8(△자료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http://www.much.go.kr/museum/nrms/view.do?idnbr=PS01002025001-015678-00000#none)

이렇듯, 3⋅1 운동은 일본 유학생들의 거사에 자극을 받아 시위 일을 고종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던 일반 민중들이 고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인 1919년 3월 3일에 앞서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마침내 1919년 3월 1일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를 제외한  민족대표 29인은 경기도 경성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 명월관 지점(태화관)에 모여 기독교 측 16인「감리교인 9명(박희도· 김창준·오화영·박동완·신석구·이필주·신홍식·정춘수·최성모), 장로교인 7명(유여대·김병조·이승훈·이명룡·양전백·길선주·이갑성), 천도교 측 15인(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권병덕·양한묵·이종일·이종훈·홍병기·김완규·임예환·나인협·홍기조·나용환·박준승), 불교 측 2인(한용운·백용성)」등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하여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서 / 기미년 삼일독립선언서(한글본 전문, 국한문 병행본 / 공교육 3.0 뉴스 2021. 02. 08.  참고」100장을 펴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열람하게 했으며,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한용운이 일어나 이를 낭독한 다음 대한독립 만세를 삼창하고 독립선언을 마쳤으며 출동한 경찰관에게 체포되었다. 

「독립 선언서」 원고는 오세창을 통해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 인쇄소 사장 이종일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1919. 2. 27. 공장 감독 김홍규와 함께 「기미 독립 선언서」를 인쇄「독립운동가·제국신문과 만세보 등의 창간과 발행을 통해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한 언론인인 장효근 일기(張孝根 日記, 국가 등록문화재 제714호, 2018. 05. 08. 지정, 독립기념관 소재)하여 경운동 자기 집으로 운반하였다.「독립 선언서」는 2. 28.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배포되었고, 3⋅1 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하였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비폭력 항일 만세운동,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 모습과 방법은 달랐지만, 나라를 사랑한 선조들의 마음은 같은 모습이었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현대문, 원문, 원본 이미지), 독립기념관(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종로구 등)」. 

 같은 시각 서울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사적 제354호)에서는 학생, 시민 등 약 5천 명이 모였고 정재용이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군중은 탑골공원을 기점으로 남대문통, 의주통, 정동 미국영사관 앞, 대한문 앞, 장곡천정(長谷川町), 본정(本町) 등을 활보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거의 같은 시기에 3.1 만세운동의 시위가 지방의 주요 도시와 더 나아가 해외로 확산하여 잇달아 일어났으나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뉴욕타임스는 1919. 3. 13. 자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 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기록했다.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다.

 인도의 이자와할랄 네루가 1930. 10. 26.부터 1933. 9. 8.까지 약 3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면서 그의 외동딸 인디라 간디에게 쓴 196회분의 편지를 책자로써 묶은 도서인 「세계사편력(世界史遍歷)」에서 1932. 12. 30. 날짜에 3.1운동의 감명을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 - 이 나라는 옛날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상쾌한 아침이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독립을 위한 항쟁이 계속되어 여러 차례 폭발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봉기였다. 조선 민족 - 특히 청년 남녀는 우세한 적에 항거하여 용감히 투쟁했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조선 민족의 조직체가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인에 반항했을 때, 그들은 수없이 죽어갔고, 수없이 일본 경찰에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이처럼 그들이 이상(理想)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했다. 일본에 의한 조선 민족의 억압은 역사상 실로 쓰라린 암흑의 일장(一章)이었다. 조선에서 흔히 학생의 신분으로, 또는 갓 대학을 나온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듣는다면 너도 틀림없이 감동을 할 것이다.” (3.1절 유감(有感) - 1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올해의「3.1절」은 코로나 19 탓으로 직접 가 보지는 못하지만, 독립 운동가들이 묻힌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과 독립지사의 정신과 기억이 깃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등 역사의 현장에서 독립운동가의 애국의 숭고한 숨결을 느껴 보면 어떨까. 

 제102주년 3.1절, 망우리 공원에서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느낀다. 

 서울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소재한 망우산 기슭에는 일제에 항거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수많은 순국열사와 애국지사들이 잠든 곳, 망우리 공원이 있다. 3·1 운동의 상징 유관순과 시위 결사대로 참여한 김분옥, 민족대표 33인의 주요 인물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한용운·오세창·박희도와 이외에「망우 독립유공자 묘역」에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2012. 10. 19. 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된 만해 한용운 묘소를 비롯하여 2017. 10. 23. 등록문화재 제691-1호~8호로 지정된 위창 오세창·문일평·방정환·오기만·서광조·서동일·오재영·유상규 등의 묘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고 또, 다시금 부르고 싶은 독립운동가로 김병진·김진성·이영학·조봉암·장덕수·조제언·조종완 등이 있다. 이곳에 있다가 국립(서울·대전) 현충원 또는 사묘 및 공원묘지 등으로 이장된 김봉성·김승민·김윤식·김정규·나운규·강학린·문명훤·백대진·김사국·박원희·서병호·송진우·최백근 등이 있었던 역사적 장소이고 애국의 성지로서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 계승과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기념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독립유공자의 더 많은 정보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디지털아카이브, 국가보훈처 독립 유공자 공훈록·전자 사료관,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 정보서비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 역사정보통합시스템, 우리역사넷, 전자 사료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국기기록원 독립운동관련판결문, 독립기념관, 만해기념관,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민속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 손안에 서울 2020. 08. 11.,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천안시청 유관순열사 기념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3.1 여성동지회,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이화 100년 사 이화여자대학교, 중랑구청 망우리 공원 , 뉴시스 2019. 03. 01., 창의적 체험활동 중랑 지역 사랑 나눔 체험 봉사활동 중랑교육발전협의회 자료집 등에 담고 있다. 

제102주년 3.1절, 망우리 공원에 묻힌 다시 부르는 그 이름,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독립운동가 유관순(柳寬順)이 생각난다.  유관순은 3·1운동의 상징으로 전 국민에게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유관순 가(家)의 사람들은 천안시 갈전면 병천(竝川) 아우내와 공주읍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며,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다. 유관순은 광복 이후에도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애국심 함양의 표상이 되어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공적으로 정부에서는 1962. 3. 1. 건국훈장 독립장을, 2019. 3. 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였다. 이화여고는 그에게 1996년 5월 명예 졸업장을 수여 했다

 그의 오빠 유우석은 유관순이 어린 시절 잘 불렀던 노래는 당시 마을 청년들이 부르던 우국 창가로 “무쇠 골격 돌주먹 청년, 남아야...”, “샘물이 돌고 돌아….” 란 가사가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관순이 1919년 이화 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경성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한다. 

당시 그는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보면서 ‘잔 다르크’ 책을 읽고 나라를 구하는 데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 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이어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그는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김분옥·서명학·김희자·국현숙·유점선 등 6명의 이화 여자고등보통학교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 시위에 참여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그는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탑골공원과 남대문 역(서울역) 등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함으로써 3·1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다. 유관순과 독립운동을 함께 한 결사대 중에는 김분옥도 있다. 망우리 공원 김분옥여사지묘(金芬玉女史之墓) 비석 뒷면에 그의 행장(行狀)이 적혀 있다. ‘(이화학당에) 재학 시에는 방학 때마다 농촌 계몽운동을 하였고 유관순과 같이 민족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중략) 장학생으로 도미(渡美) 유학을 시켜 가사과(家事科)를 전수케 하였다…….’(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2020. 03. 01.).

  이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10.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이 내려졌으므로 그는 3. 13.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서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1919년 3월 1일(양력 1919. 4. 1.) 정오 충남 천안시 아우내 장터(並川, 병천) 장날에 태극기를 품고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서 독립선언서를 외치고 이어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으로 만세 시위를 이끌던 주인공이 바로 16세 소녀 유관순이다. 당시 미국 동포신문 「신한민보」에 보도된 유관순에 대한 기사에는 '한 이화 여학생의 체포'라는 제목 밑에 ‘소녀의 양친은 원수에게 피살’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그 후 공주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과정 중에 그는 법정에서 “제 나라를 찾기 위해 정당한 일을 한 것인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며 항변했고, 다른 이들 또한 “평화적으로 무기 없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질을 하느냐.”고 대응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19. 5. 9.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여  6. 30.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자 그 취지에 찬성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고 하여 보안법 위반과 소요 죄명(罪名)으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형무소)에 갇힌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한 오후 2시. 유관순이 있는 3평 남짓한 서대문 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 중인 7명의 여성 독립운동가「1919년 공주 감옥에서 서울로 이관이 되어 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개성에서 3·1운동을 한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유일한 시각장애인, 아들 문수일 증언)· 어윤희,  또 수원기생조합 출신 김향화, 경기도 파주에서 만삭의 몸으로 3·1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임명애)들과 함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독립선언서의 공약을 따라  "삼천리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라며,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이 일어났다(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 점자새소식 2019. 03. 15.).  

 한편, 유관순 외 6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수많은 공포의 밤을 스스로 달래고 용기를 불어넣으려 옥중에서 만들어 불렀던 창가(唱歌ㆍ노래)인 서대문형무소 여옥사(女獄舍) 8호실의 노래(대한이 살았다)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창가는 모두 두 곡으로, 심명철이 생전에 아들 문수일에게 구술하였다. 두 노래는 《선죽교 피다리》(1991, 장수복 저)라는 소책자에 실린 바 있으나, 해당 책자는 소량만 발간되어 현재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며, 노래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2019년 2월이다. 

 첫 곡의 가사는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로, 애절한 당시 상황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여기에서, ‘진중이’는 죄수를 뜻하는 은어로 많이 쓰였던 ‘전중이’의 오기로 보이는데, 표준국어사전에는 ‘전중이’가 ‘징역살이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정의돼 있다. ‘진흙색 일복’은 ‘황토색 일본 옷’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당시 죄수복을 의미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둘째 곡의 가사는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로, 전국에 확산된 3ㆍ1운동의 기운을 ‘대한이 살았다’로 표현하고, 독립을 바라는 결기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힘찬 기상과 용기를 담고 있다(한국일보 2019. 01. 01., 2019. 02. 22., 2019. 02. 23., 여옥사 8호실의 노래 '대한이 살았다' KB국민은행, 위키백과).

유관순은 조국의 푸른 하늘을 되찾으려다 18세에 일제의 서슬 푸른 칼날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시인 박두진은 '3월 1일의 하늘'에서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 터져 솟아나는 비로소 끓어오르는 민족의 외침의 용솟음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르레안, 쨘다르끄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 수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그리고 시인 강소천도 '유관순'에서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 봅니다.” (강소천 홈페이지, 아시아경제 2017. 02. 28., 천안시 유관순열사기념관)

 꽃다운 나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인왕산 자락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의 마지막 남긴 말이 귀를 쟁쟁히 울린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그는 옥중에서도 계속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1920. 9. 28. 오전 8시 20분에 온갖 고문과 악형으로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리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그의 나이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만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국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등).

 2013. 11. 19.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으로부터 이관 받아 공개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 있는 유관순(17세)의 기록은 ‘3·1 독립운동 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 당함.’이라 적혀있다. 그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 씨는 ‘3·1 운동 독립 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함.’으로 적혀 있다. 그의 시신은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조선 시대 지방관아가 있었던 부군당(府君堂) 옆 역사공원 안에 용산구에서 2015. 9. 23. 유관순의 추모비를 세움」안에 안장되었으나, 이곳을 주택지로 만들어 민간에게 불하하기 위해 무연묘(無緣墓)를 망우리에 합장(동아일보, 1937. 6. 9.)할 방침으로 이장공사를 착수하여 5월 말부터 6월 말엔 완성할 것이라는 보도(동아일보  1936. 4. 9.)를 보면 이 과정에서 없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한편, 1989. 10. 12.에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산 31-2(매봉산 중턱)에 봉안된 유관순 초혼묘(招魂墓)의 문안을 보면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이게 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가운데 열사의 주검은 흔적도 없이 망실되었다고 적었다. 망우리 공원에는 2018. 9. 7.에 3·1 독립운동의 상징인 민족의 딸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가  세워졌다

 망우리 공원에는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만해 한용운, 오세창, 박희도가 있다.

 만해 한용운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직접 작성하였다. 그는  삼일운동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한 뒤 1919. 7. 10. 옥중에서도 일본인 검사의 요구에 답하는 형식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작성하여 조선 독립의 정당한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라고 시작하는 개론부터, 독립 선언의 동기와 이유에 이어 조선 총독 정책을 비판하면서 조선독립을 자신하는 내용으로 끝맺고 있다. 「조선 독립의 서」라는 명칭으로 <초고본>과 <정서본>이 존재한다. 인간의 권리,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자신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 11.4.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sbs 뉴스 2019. 02. 26.). 

 민립대학건립운동 등 지속해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1926. 5. 20. 시집 「님의 침묵」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혼을 깨우려 한 저항 문학을 선도하였다. 1927. 1. 19.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경성지회장 취임하여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한용운이 조선 말기 죽음으로 경술국치에 항거한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의 순국 정신에 감동해 황현의 유족에게  1914년 직접 써서 준  ‘매천선생(梅泉先生)’이 있다. 이 시는 황현의 사해형제(四海兄弟) 제10권에 실려 있다. 그의 후손들이 소장(전남 순천)하고 있다. 이 시 구절에는 “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就義從容永報國). 한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一暝萬古劫花新). 이승의 끝나지 않은 한 저승에는 남기지 마소서(莫留泉坮不盡恨). 괴로웠던 충성 크게 위로하는 사람 절로 있으리(大慰苦忠自有人).”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문화재청 2019. 2. 18. 보도 자료). 그는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1944. 6. 29.(음력 5. 9.) 서울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자택에서 입적하였다. 그는 일제 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일본식 성명 강요와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 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하였다. 위창 오세창은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한 말의 을사늑약 체결 등을 반대하고 독립협회 이후 대한자강회를 조직,  민족과 역사를 위해 3.1 독립선언에 뛰어들었다. 경성지방법원의 [오세창 신문조서]를 보면, 판사가 “조선에서 민족자결의 취지에 따라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묻자 그는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 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고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담대하게 말한다. 1946. 8. 15.에는 민족대표로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의 국새를 돌려받았고, 그리고 1949년 백범 김구가 암살당했을 때 장의위원장직을 맡는다. 서화가이자 황성일보 사장 재임, 천도교 원로 언론인이다. 그는 “문화발전에 크게 힘주었고 서예와 금석 고증의 거벽을 이루니 평생에 남긴 위공이 길이 빛날 것이다.”라는 그의 묘비에 새겨질 정도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망우리 공원에 있는 노고산천골취장비, 방정환묘비, 설태회 묘비에 글씨를 남겼다. 그는 반민특위 재판이 열린 법정에 자신의 서체로 당당하게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현판을 내걸 수 있었던 그는 대립과 갈등, 변절과 친일의 시대를 견뎌 내고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등 1953. 4. 16. 서거하신 그날까지 추앙받는 민족의 원로 지도자로 활동한 독립 운동가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천자문(千字文)에 앞서 공부했던 기초학습서인 사자소학(四字小學)을 보면 ‘백족지충(百足之蟲) 지사불강(至死不僵)’이라는 말이 있다. 발이 백 개 달린 벌레는 죽음에 이르러도 자빠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풍뎅이는 죽으면 발랑 뒤집어져 죽는다. 누가 봐도 풍뎅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네는 발이 여러 개 달려 죽었어도 죽은 것인지 모른다. 건드려봐야 알 수 있다. 세력이 크면 비록 한때 약해지더라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백족(百足)은 노래기의 별칭으로, 삼국시대 위나라 조경(曹冏)의 육대론(六代論)에 “옛말에 이르기를 ‘발이 백 개 달린 벌레는 죽어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지탱하고 있는 것이 많아서이다.” 하였다. 그게 3·1운동 정신이었다(동양고전종합 DB).  

 제102주년 「3.1절」은 나라를 먼저 생각한 순국선열들을 기리고,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더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 시기는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당하고, 민족 자신의 발전이 중단되는 고통의 역사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은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의 바탕 위에 이룩된 것임을 모든 국민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선열들의 국권 회복을 위한 순국 정신을 국민의 나라 사랑 정신으로 계승하고자 하는데 「3.1절」을 기리는 참뜻이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면서 가끔은 소중함과 감사함을 잊은 채 지내곤 한다.  3월 1일이 다가와서야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그들의 정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분들은 누군가가 시켜서 목숨 바쳐 한 일이 아니다. 그 당시에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지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며, 역사적인 자긍심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렇듯 ‘들꽃처럼 이름 없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희망이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는 격동과 시련의 역사로 정의되지만, 그 과정 속에는 ‘건국, 호국, 구국’을 위한 영광과 도전이 점철돼 있기에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3·1운동의 함성과 뜨거운 역사가 있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현재도, 부러워할 미래도 있기에 온 국민들이 오롯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의 애국심을 우러러 기리며 이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고 그분들이 흘렸던 피에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만들어 가면 하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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