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2-09-28 19:05 (수)
실시간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그리며...
상태바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그리며...
  • 교육3.0뉴스
  • 승인 2022.06.11 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홍순철 「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장, 세종로국정포럼 위원장, 사단법인 좋은교육협의회 회장,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주간, 한국문예작가회 지도위원(수필가 귀연 貴緣), 현(現)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 (前)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세계 도덕 재무장(MRA / IC) 서울 총회장, 신현고등학교 교장」
홍순철 「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장, 세종로국정포럼 위원장, 사단법인 좋은교육협의회 회장,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주간, 한국문예작가회 지도위원(수필가 귀연 貴緣), 현(現)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 (前)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세계 도덕 재무장(MRA / IC) 서울 총회장, 신현고등학교 교장」

 ●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힌 시인 박인환은 1950년에 피난지 부산에 모인 김경린, 김규동, 이봉래 등과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後半紀)」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는 1955. 10. 1., 시 「목마와 숙녀」를 『시작』에 발표하고 같은 해 10. 9, 『시작』 지에서 주최하는 ‘제1회 시 낭독회’에서 「목마와 숙녀」를 낭독한다. 

 박인환 시인은 1955. 10. 15. 첫 시집이자 생전에 발간된 유일한 시집인 『박인환 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산호장(珊瑚莊)에서 간행했는데, 8·15해방 직후의 혼란과 1950년대 6·25전쟁 전후(戰後)의 황폐함과 메마른 현대 도시 문명으로 인한 상실감, 비애감 등을 겪으면서 느꼈던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 인간적인 것을 확신하고, 어두운 현실과 풍속을 서정적으로 묘사하여 그 시대 사람들이 폭넓게 공감하였다. 

 시집의 후기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라고 토로했듯이 한국전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전쟁의 아픔과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극복 의지를 다지고 시를 썼다. 

 그랬던 그는  1955년 첫 시집  ‘박인환 선시집’을 출간한 뒤 1956년 31세 젊은 나이로 삶을 거두기 1주일 전에 쓰인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세월이 가면」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연인을 잃고, 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많은 사람의 가슴을 적신 화제작이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힌 그의 비문에는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에서)의 한 구절이 쓰여 있다.

 ●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태어나 인제공립보통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한 박인환은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았던 영향을 받은 최고의 로맨티시스트로 알려졌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신태양』 (1954. 4)에 실린 「원시림에 새소리, 금강은 국토의 자랑」에서 박인환은 “민족적인 동란의 화재는 온 강원도가 받았다. 어질고 가난한 내 고향 사람은 오랜 조상이 살던 집을 포화에 살리고 양구, 화천, 금화, 고성, 춘천, 횡성, 원주, 홍천과 같은 도읍은 언제 인간이 살던 토지인가 하고 반문할 정도로 회진(灰塵)으로 사라졌다. 얼마 전 나는 강원도를 찾았다. 내가 살던 집, 학교, 군청, 어디서 그 자취를 찾으랴. 그저 산과 물은 전과 다름이 없으나 그 외 모든 것은 모진 화열에 휩쓸리고 선량한 아직 때에 젖지 않은 사람들은 한없이 맑은 푸른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다.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 거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라며 “어질고 가난한 내 고향 사람”들의 “근성을 나는 배반 할 수가 없다.”라고 밝혔듯이 뿌리 의식이 강했다 「원시림에 새소리 , 금강은 국토의 자랑 | 어문 | 공유 마당 (copyright.or.kr)」.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繪畵) / 피 묻은 전신주 위에 /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 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 세상엔 없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와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고향은 고향은 어려서 부르던 그것뿐이다...” 이 시는 1951년 박인환 시인이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 고향인 인제에 와서 지은 ‘고향에 가서’이다. 고향에서 자신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한다. 지금의 스산함, 적막함, 전쟁의 참상을 설명해 주는 글이다 「국방일보 박인환, 고향에 가서, 2018. 11. 16.」.

박인환은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경향신문사가 대구에서 전선 판 신문을 발행하면서 그는 종군 기자로도 활약했다. 당시 전투로 폐허가 된 서울 외곽을 르포 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시흥, 안양 도로 연변의 주택은 지난번의 전투로 폐허가 되었고 혹시 남아 있는 가옥이라고 해도 공산군의 약탈로 가재는 사방에 흩어져 그 참상이야말로 필설로 표현키 어려울 뿐 눈물이 솟아날 것만 같았다.” 「노량진에서 본사 특파원 민재정, 박성환, 박인환 발. 경향신문 1951. 2. 20.·21일 자, [경향사람들] ‘목마와 숙녀’의 시인, 한국전쟁 터지자 종군기자로도 ‘맹활약’ - 경향신문 2016. 02. 19.」
박인환은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경향신문사가 대구에서 전선 판 신문을 발행하면서 그는 종군 기자로도 활약했다. 당시 전투로 폐허가 된 서울 외곽을 르포 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시흥, 안양 도로 연변의 주택은 지난번의 전투로 폐허가 되었고 혹시 남아 있는 가옥이라고 해도 공산군의 약탈로 가재는 사방에 흩어져 그 참상이야말로 필설로 표현키 어려울 뿐 눈물이 솟아날 것만 같았다.” 「노량진에서 본사 특파원 민재정, 박성환, 박인환 발. 경향신문 1951. 2. 20.·21일 자, [경향사람들] ‘목마와 숙녀’의 시인, 한국전쟁 터지자 종군기자로도 ‘맹활약’ - 경향신문 2016. 02. 19.」

 ● 서울에서 시인 박인환의 흔적을 찾아 광화문 근처를 걷다 보면, 큰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무척이나 책을 좋아하던 그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학교를 중퇴하고 상경. 서울 종로 3가 2번지(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한다. 

 그렇게 책을 좋아했던 시인 박인환, 서울 종로 1길 대형 서점 교보문고 뒤쪽 주차장 입구에  ‘박인환 선생 집 터’라고 쓰인 표석이 눈에 띄어 무척 반갑다. 

 ‘박인환 선생 집 터’라고 쓰인 표석에는 ‘이곳은 포스트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이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1955년에는 박인환 시선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지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내친김에 지금은 사라지고 표석만 남은 명동 유네스코 맞은편(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3길 2)에 있는 박인환이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지은 명동 예술인들의 사랑방 ‘은성주점 터’를 찾았다. 표석에는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라고 돼 있고 내용은 “이곳에서 약 10m 앞에는 1960년대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봉구(1915~1983)와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등이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던 주점 터이다. 특히 이봉구 선생은 명동을 좋아하여 ’명동시장(明洞市長)·명동백작(明洞伯爵)‘이란 애칭으로 불렸다.”고 쓰여 있다. 2004.12. 서울특별시에서 만들어 놓았다 「박인환문학관 (parkinhwan.or.kr), 중랑구청 홈페이지  공원 내 인물>문화예술인사 (jungnang.go.kr) 박인환」.

 은성주점(銀星酒店)은 1950~60년대 예술의 중심지인 명동에서 가난한 시대 문화예술인들이 막걸릿잔 너머로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웠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온 술집이다.  인천에서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던 최불암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1986년 작고)이 1953년 은성이란 이름으로 명동에 연 막걸릿집이었다. 은성주점은 다른 술집에 비해 정갈하여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당시 대폿집은 드럼통을 통째로 세워놓고 그 위에 막걸리와 안주를 놓는 식이어서 의자에 앉으면 드럼통에 목을 걸칠 정도였는데, 은성주점은 드럼통을 반 잘라 그 위에 상을 놓았으니 술 마시기에도 좋았다. 은성주점은 일명 ‘봉구주점’으로도 불리었는데, 명동과 은성주점을 사랑했던 ‘명동백작’ 소설가 이봉구가 거의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다시피 한 데서 유래한다. 은성주점은 이봉구의 단골집으로 마치 은성주점에 늘 있는 풍경과도 같다고 하여 ‘은성의 풍경화’라고도 불리었다. 

 이봉구는 소설 「그리운 이름 따라―명동 20년」에서, 은성주점에서 거의 밤새워 매일 술을 마셨지만, 술값을 지불한 일이 없고 달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 「명동 엘레지」에서도 은성주점에서의 자신의 사적 체험과 서정 취향을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로 은성주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31세 나이로 요절한 시인 박인환이 은성주점에서 즉석에서 지은 시 ‘세월이 가면’은 작곡가 이진섭이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었는데, 일명 ‘명동의 노래’로 일컫기도 한다. 

 시대의 아픔을 녹여낸 노래, 명동 샹송 - 「세월이 가면」이란 시가 노래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어있다. 은성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시인 박인환 일행이 밀린 외상값을 갚지도 않은 채 계속 술을 요구하자, 은성주점 주인이 술값부터 먼저 갚으라고 요구한다. 이때 박인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펜을 들고 종이에다 황급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은성주점 주인의 슬픈 과거에 관한 시적 표현이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박인환은 즉시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데려다가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 노래를 들은 은성주점 주인은 눈물을 흘리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의 「명동」에서 소개되고 있다 「역사문화자원 | 문화/역사 | 중구 문화관광 (junggu.seoul.kr)」.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에서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라고 읊듯이 우리의 삶에서 잊은 이름은 누구이고 잊지 않은 이름은 몇이나 될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