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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은 제81주년 「순국선열의 날」, 오롯이 목숨 바친 순국선열의 애국심을 우러러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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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은 제81주년 「순국선열의 날」, 오롯이 목숨 바친 순국선열의 애국심을 우러러 기리며
  • 교육3.0뉴스
  • 승인 2020.11.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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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역사를 품은 곳,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에서 항일 의병들의 구국 충절의 정신을 기리며 「13도 창의군 탑」과 독립운동가 유관순, 한용운 등과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 아픔의 역사를 보듬는다.
홍순철(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장, 학교법인 송곡 학원 이사장, 사단법인 좋은 교육협의회 이사 겸 회장, 세종로국정포럼 서울 중랑교육발전위원장, 한국교육학회 종신(終身) 정회원, 칼럼니스트, 교육언론인)
홍순철(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장, 학교법인 송곡 학원 이사장, 사단법인 좋은 교육협의회 이사 겸 회장, 세종로국정포럼 서울 중랑교육발전위원장, 한국교육학회 종신(終身) 정회원, 칼럼니스트, 교육언론인)

“온 겨레 나라 잃고 어둠 속 헤매일 때/자신을 불살라서 횃불마냥 밝히시며/국내외 광복전선서 오롯이 목숨 바친/님들의 그 충절이 겨레의 얼 지켰네./

 님들이 목숨 걸고 외치고 바란 바는/ 오로지 일제에서 해방만이 아니었고/ 세계의 정의와 질서 밝히고 이루려는/ 드높은 평화이상 바탕하고 있었네.

  (후렴) 우리는 순국선열을 우러러 기리면서/ 그 후예다운 떳떳한 새 삶을 다짐한다.”

   구상 작사, 김용진 작곡 ‘순국선열의 날’ - 순국선열을 우러러 기리며 -  노래이다.

 11월 17일은 제81주년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날은 일제에 침탈당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으로 순국한 선열들의 영령을 애도하고, 숭고한 독립정신과 고귀한 헌신·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며 이를 바탕으로 선열의 얼과 위훈(偉勳)을 기리어 국민들의 나라 사랑 정신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제정한 법정 기념일이다. 

 그렇다면 「순국선열의 날」이 제정된 배경은 어떠할까.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사 속에서 「순국선열기념일」제정에 관한 제안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중국 사천 기강 현 임강가 43호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제31회 정기총회에서 매년 11월 17일을 전국 동포가 공동으로 기념할 순국선열기념일(殉國先烈紀念日)로 정하자는 지청천, 차이석 등 두 의원의 제안에 대하여 원안대로 통과하기로 결의하니, 원안의 이유가 아래와 같았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마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자못 번거(煩擧)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無名先烈)을 유루(遺漏)없이 다 알 수도 없음으로 1년 중에 1일을 정하여 공동으로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認)한 바이오. 이제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殉國)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國亡)을 전후(前後)하여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亡)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비분(悲憤) 또는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 것으로 말하면 경술년 8월 29일의 합방발표(合邦發表)는 그 형해(形骸)만 남았고 국가의 종국(終局)을 고(告)하였을 뿐이오, 기실(其實)은 을사년 보호 5조약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므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亡國條約)이 늑결(勒結)되던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기념일로 정한 것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 1권 임정 편 1,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사 록,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이처럼 「순국선열의 날」기념식은 1940~1945 광복으로 환국할 때까지 매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정기념행사로 거행하다가, 광복 후 1946∼1949 광복회 등 민간단체에서 주관해 순국선열 추모 행사를 거행해 왔고 1950년 6․25전쟁으로 1954년까지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1955~1969 정부 주관의 추모(기념) 행사가 거행되었으나, 1970~1979 정부행사 간소화 조치로 정부 주관 행사는 폐지되고  공식행사는 현충일 추념식에 포함되어 유족단체 주관 기념행사로 거행되었다. 1981~1996 각계대표로 구성된 순국선열 공동 추모 제전위원회 주관의 기념행사로  거행되는 과정에서 1988년 9월 이후 광복회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등이 순국선열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복원․제정해 줄 것을 정부에 지속해서 건의해 1997. 5. 9.에 이르러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11월 17일을 ‘순국선열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한 이후에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그 기념식을 매년 11월 17일 11시 지정 장소에서 정부 주요 인사, 독립유공자 및 유족, 각계대표, 시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 약사보고 / 독립유공자 포상 / 기념사 / 기념공연 / 순국선열의 노래 순서로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국방일보(2009. 11. 17.)」.

그 행사 때 등장하는 용어가 있다. 국민의례 규정(대통령 훈령 제368호, 2017. 8. 10.) 제4조(국민의례의 절차 및 시행 방법) 및 정부 의전편람(행정자치부, 2014. 12.), 서울시 의전 실무 편람(2014. 12.)을 보면, 중앙행정기관, 지자체, 소속 산하기관·단체 등에서 각종 행사를 할 때 제일 먼저 행하는 의식으로 국민의례가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국기에 대한 맹세 포함),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바친 용사)에 대한 묵념 순서로 시행한다. 이렇게 행사할 때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올리는 이유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분들의 드높은 애국정신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다. 추념(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추모(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 추도(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슬퍼함)는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고 헌신했거나 인품과 덕망이 높아 존경을 받았던 이들에 대해 사용하는 유의어다. 주기(사람이 죽은 뒤 그 날짜가 해마다 돌아오는 횟수)는 추념이고 주년(일 년 단위로 돌아오는 돌을 세는 단위)은 기념이라고 한다. 

독립유공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나누어 부르고 똑같은 독립운동가 이다.  

‘순국선열’은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약칭: 독립유공자법) 제4조 1항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분으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선열들을 일컫는다. 

 1960년 보사부 순국선열선정회의록을 보면 그해 정부가 ‘순국선열 선정 회의에서 정한 범위와 유형은 일제와의 투쟁 과정에서 전사, 형사, 절사(자결), 피살, 옥사, 옥 병사 등 6개 항에 해당하는 경우 순국선열로 규정하는 것으로 돼 있다.

 해방 전에 순국한 순국선열에 대하여 1992. 8. 15. 순국선열유족회가 세운 '순국선열 추념 탑'의 건립 취지(추모내용)를 보면,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 말·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선열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렇듯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 전쟁, 안중근·강우규·이봉창·윤봉길 같은 의열투쟁, 유관순 등 1919년 3·1독립운동, 홍범도의 봉오동전투·김좌진 청산리전투 같은 독립군 전투, 이동녕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한유한(한형석)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하거나 혹은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분 등이 있다(효창공원 임정 요인묘역 등).

 해방 후 서거한 애국지사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 2항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사람 즉, 독립운동을 하다가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분들을 이른다. 일제강점기 안명근(안악사건 관련), 김구․이시영․조성환․차리석(임시정부 요원), 박열·이범석·지청천(광복군 관련) 등을 애국지사라 부른다.

 그런데 독립유공자분들의 이름 뒤에 의사(義士), 열사(烈士)라는 호칭이 어떤 기준으로 붙는 것일까. 2005. 10. 4. 국가보훈처가 밝힌 의사, 열사의 정의에 대한 주된 견해는 의사․열사를 구분하지 않고 ‘독립유공자’로 표기하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구분하고 있으며 법률적 용어는 아니지만, 국가를 위해서 희생한 독립운동가 분들을 민간이나 학계에서 의사와 열사를 통념적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그 기준이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런 ‘열사’와 ‘의사’의 개념은 1970년대 지금의 국가보호처인 원호처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독립 운동사 편찬을 앞두고 항일 선열들의 공적을 조사할 때 처음 정해졌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의사(義士)의 개념을 성패와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무력(武力)으로써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한 사람이며 대표적 인물은 일제강점기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미국에서 스티븐스 저격 사건과 관련된 장인환, 1932년 일왕에게 홍커우 공원에서 투탄 의거한 이봉창, 같은 해 홍커우 공원 투탄의 윤봉길, 백정기, 김상옥, 김구 등이 대표적 예다(효창독립 100년 메모리얼 프로젝트, 효창공원 3 의사 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열사(烈士)는 직접적인 행동 대신 강력한 항의의 뜻을 자결로써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보인 사람으로 대표적 인물은 1919. 3. 1. 만세운동에 참가해서 감옥에 투옥돼 사망한 유관순,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며 자결한 민영환, 1907년 헤이그 특사로 독립 의지를 표명 자결한 이준,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한 황현, 대한제국기 주영국 대리공사 이한응 (영국 런던 얼스코트 트레버로드에는 그와 관련 순국지. 대한제국 공사관건물이 있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국가보훈처 2015. 6. 18. 순국선열유족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국가보훈처 국가 현충시설 오열사 충혼탑, 전남대학교 국어문화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겨레신문 2012. 3. 1., 중앙일보 2015. 8. 11.」.

 일본 강점기의 역사가이며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듯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이제 제81주년‘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이들이 걸었던 독립지사들의 뜨거운 숨결이 담긴 길들을 따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독립의 밑거름이 된 그 역사적 장소를 회상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수많은 순국선열의 희생과 헌신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극장 옆의 골목으로 들어가면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경복궁의 집옥재와 같은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경에 완성된 건물, 처음 이름 수옥헌(漱玉軒)」이 나온다. 중명전은 1905. 11. 17. 통감 정치 실시․외교권 박탈․보호 국화를 위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가장 아픔이 서린 비운의 역사의 장소이다. 서울 종로 우정국로에 있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앞 길가에 ‘민영환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의 표지석에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집터(조계사 경내).'라고 쓰여 있다. 충정로 1가의 동명은 1905. 11. 30. 순국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의 시호인‘충정’에서 유래되었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세상을 떠난 집에서는 그의 피가 있던 자리에 대나무가 돋아났다고 한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등).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종은 이때야말로 일본의 굴레를 벗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대표 파견을 결심하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이들을 도울 호머 헐버트 등에게 친서와 신임장을 휴대시켜서 밀명을 내렸던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 및 내각 총리 이완용 등 내각 대신은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대한제국의 고종(高宗)을 군대로 위협하여 1907. 7. 20.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다음 그해 7. 24. 한일 신협약(제3차 한일협약, 정미 7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우리 정부의 각부에 일인 기관을 두어, 이른 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강요하여 정부를 장악한다.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 내 주요 관직에 일본인이 임명되어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을 장악해 갔다. 한편,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 명이었던 독립운동가 이위종 열사의 조국 광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불꽃 같은 삶을 재구성한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김영사) 출간에 맞춰 그의 외손녀 류드밀라 예피모바 여사와 외증손녀 율리아 피스쿨로바 전 모스크바대 역사학부 교수가 한국을 찾았다「일제하 민족 언론사론(최민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문화재청 궁능 유적 본부 덕수궁관리소, 중앙일보 2019. 7. 17.」.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현저동)에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에는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서대문형무소의 옥사 및 사형장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공립박물관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비롯하여 독립협회에서 건립했던 독립문, 독립관, 순국선열추념탑, 3·1 독립선언 기념탑, 영은문 주초(柱礎), 서재필 박사 동상 등이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구 서울구치소 시설을 개조하여 과거 경성감옥․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서울형무소를 복원하여 1998년 11월 5일 개관한 독립운동 관련 역사관이다. 서대문형무소의 옥사는 붉은 벽돌의 원형 감옥 형태인 패놉티콘(panopticon) 구조로 만들어졌고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는데 그중에 상당수가 옥중에서 순국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여옥사 8호 감방에는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1919년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동풍신, 권애라, 김향화, 신관빈, 심영식, 어윤희, 임명애가 수감되어 있었고 박의송, 손병희, 한용운 등이 이곳에서 순국선열 했다. 지하철 독립문역 3번 출구 앞에는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를 옥바라지했던 가족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를 기억하는 전시 공간인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 있다. 독립투사들이 혹독한 수감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자 독립운동의 조력자인 가족들의 삶을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재조명했다. 한편, 대한광복회 백산 우재룡 선생기념사업회가 펴낸 정인열의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에 따르면, '형무소'라면 흔히 서대문형무소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국한 독립유공자는 서대문형무소는 물론 대구형무소에도 일제에 의해 체포된 항일 애국지사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감옥(1923년 5월부터는 대구형무소로 개칭)에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거나 수감 중 자결, 고문 옥사 그리고 출옥 뒤 고문 후유증 등으로 타계한 순국 독립유공자가 있다고 말하며 그 대구형무소는 이 땅의 한국인 영혼이 깃든 역사적인 곳이지만 1971년 달성군 화원으로 옮긴 뒤 지금은 사라졌고, 형무소 터 안에 세워진 삼덕교회 한쪽 벽면에 당시 배치도와 건물 사진 등의 흔적만 남아있다고 한다. 현재,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시민들의 모금 등으로 2024년 완공을 목표로 대구형무소 역사관과 대구 독립운동역사관 등을 조성하기로 했다고 전한다(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홈페이지, Ohmy News 2020. 6. 30. 영남일보 2020. 9. 8.).

 서울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진 망우산 기슭에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수많은 독립 열사와 애국지사들이 잠든 곳, 망우리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문화재로 등록된 민족대표 33인의 주요 인물로 3·1운동을 주도한 만해 한용운 묘소를 비롯하여 위창 오세창, 문일평, 방정환, 오기만, 서광조, 서동일, 오재영, 유상규 등 수많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묘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애국의 성지이다. 특히, 망우리 공원 초입(初入) 저류조 공원 안에는 나라를 되찾고 자유를 쟁취하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항일 의병들의 구국 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독립운동 사적지  13도 창의군 탑(十三道倡義軍塔)이 있다. 이 탑은  구한말인  1907년 11월 일제에 군대마저 강제 해산되어 민족사가 끊어지려는 위기에 전국의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일제 침략의 본거지가 있는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경기도 양주에 집결, 동대문에서 30여 리 떨어진 이곳 망우리 일대에서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1. 8. 15. 동아일보사가 건립하였다. 당시 48진 1만여 명에 이르는 의병은 13도 창외대진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을,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1908년 1월 허위는 3백 명의 선봉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이곳에서 혈전을 벌였으나 후발 의병 부대의 도착이 늦어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서울을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연합 의병들의 고귀한 뜻이 깊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서울 진공 작전은 을사늑약 이후 다시 일어선 항일 의병들이 전개한 피어린 항쟁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의병들의 투쟁은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향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정미의병 사료는 캐나다 출신 신문기자 맥켄지가 1904년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내한한 후 겪은 구한말의 폭압적인 현실과 일본의 만행, 그리고 탄압을 적나라하게 작성하여 발표한 「조선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이라는 책에는 1907년 8월 군대 해산 직후 경기도 양평에서 그가 직접 의병들을 만난 뒤 남긴 생생한 기록이다. 13도 연합 의병부대의 서울 진격상황은 학자·애국지사인 송상도가 대한제국 말기부터 광복까지 애국지사들의 사적을 기록한 책인 '기려수필’에도 기록이 있다「13도 창의군 탑 기념 표석.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여주시 의병장 이인영 생가 안내, 동아일보 1962. 2. 26.,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순국선열의 날, 망우리 공원에 묻힌 다시 부르는 그 이름,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문화재청이 지난 2019. 2. 19.~4. 21.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제10, 12 옥사에서 개최한‘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특별전에서 만해 한용운의 시 ‘매천선생’도 처음으로 선보였다. ‘매천선생(梅泉先生)’은 한용운이 조선 말기 죽음으로 경술국치에 항거한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의 순국에 감동해 추모시‘매천선생’을 지어서 그의 순국 정신을 기렸고 1914년 한용운이 친필로 이 시를 써서 황현의 유족에게 직접 보냈다. 이 시는 황현의 사해형제(四海兄弟) 제10권에 실려 있다. 그의 후손들이 소장(전남 순천)하고 있다가 최초로 공개한 자료이다.  이 시 구절에는 “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就義從容永報國). 한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一暝萬古劫花新). 이승의 끝나지 않은 한 저승에는 남기지 마소서(莫留泉坮不盡恨). 괴로웠던 충성 크게 위로하는 사람 절로 있으리(大慰苦忠自有人).”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문화재청 2019. 2. 18. 보도 자료).

 유관순은 조국의 푸른 하늘을 되찾으려다 18세에 일제의 서슬 푸른 칼날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시인 박두진은 '3월 1일의 하늘'에서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 터져 솟아나는 비로소 끓어오르는 민족의 외침의 용솟음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르레안, 쨘다르끄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 수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그리고 시인 강소천도 '유관순'에서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 봅니다(강소천 홈페이지)”. 

 유관순은 두 시인만의 누나가 아닌 우리 모두의 누나로 그의 노랫말이 준 울림은 우리네 마음을 울컥울컥 북받치게 한다. 유관순 열사가 남긴 말이 귀를 쟁쟁히 울린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아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꽃다운 나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인왕산 자락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내면서 옥중에서도 계속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1920. 9. 28.에 악형으로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리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그의 나이 18세 때 옥중에서 순국한다. 2013. 11. 19.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으로부터 이관 받아 공개한‘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기록은 ‘3·1 독립 운동 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 당함.’이라 적혀있다. 그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 씨는‘3·1 운동 독립 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함.’으로 적혀 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후손으로는 그의 질부(姪婦)인 김정애 전 3.1 여성동지회장(15ㆍ16ㆍ22대)이 있다. 2018. 9. 7.에 3·1 독립운동의 상징인 민족의 딸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가  세워졌다. 2020. 9. 26.에는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기를 기리는 추모식이 중랑구청(구청장 류경기)과 유관순열사기념 사업회 공동 주관으로 서울 망우리 공원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묘역에서 거행됐다. 2015년 박흥식 감독의 영화 '해어화(解語花)'에 나오는 OST, “홀로 메마른 들판 위에 기댈 곳 하나 없이/ 못다 핀 꽃 한 송이 기나긴 어둠 속에/ 태양은 뜨지 않아 힘겨운 하루하루/ 눈물만 흐르네.”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조선의 마음’ 이 노래는 1943년 비운의 시대 미치도록 부르고 싶던 노래로 일제강점기 때의 우리 민족의 정서를 느낄 수 있어서 자꾸 듣게 된다(한국영상자료원). 이렇듯 ‘들꽃처럼 이름 없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희망이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는 격동과 시련의 역사로 정의되지만, 그 과정 속에는 ‘건국, 호국, 구국’을 위한 영광과 도전이 점철돼 있기에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제81주년「순국선열의 날」을 맞아“더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지난 역사를 잘 기억하기 위해서 조상들의 발자취를 밟으며 숭고한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그날을 회고 추념하고 기리며 그 역사성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독립운동가가 묻힌 중랑구 망우리 공원, 그리고 서대문독립공원 등 독립운동 사적지가 있다. 11월 17일 제81주년 「순국선열의 날」은 나라를 먼저 생각한 순국선열들을 기리고,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를 되풀이하지 않는 다짐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 시기는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당하고, 민족 자신의 발전이 중단되는 고통의 역사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은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의 바탕 위에 이룩된 것임을 모든 국민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선열들의 국권 회복을 위한 순국 정신을 국민의 나라 사랑 정신으로 계승하고자 하는데 '순국선열의 날'을 기리는 참뜻이 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광복도 맞이하였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현재도, 부러워할 미래도 있기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오롯이 목숨 바친 순국선열의 애국심을 우러러 기리며 이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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