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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제91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 학생들의 숭고한 항일투쟁 운동의 역사를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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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제91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 학생들의 숭고한 항일투쟁 운동의 역사를 기린다.
  • 교육3.0뉴스
  • 승인 2020.10.3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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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당시 학생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하자.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과 광주 독립운동 사적지에서 독립운동가 유관순, 방정환, 한용운, 송진우 등을 생각한다.
홍순철(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장, 학교법인 송곡 학원 이사장, 사단법인 좋은 교육협의회 이사 겸 회장, 세종로국정포럼 서울 중랑교육발전위원장,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실장)
홍순철(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장, 학교법인 송곡 학원 이사장, 사단법인 좋은 교육협의회 이사 겸 회장, 세종로국정포럼 서울 중랑교육발전위원장,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실장)

“우리는 이 나라 자손이다/ 예서 내-살과 – 뼈받고 자랐다. – 내/ 국토 위해서라면 물불 속에라도/ 뛰어들마 뛰어-들마” 

“우리는 기운찬 젊은이다/ 보라 전-통의 – 힘찬 가슴 찼다-내/ 겨레 위해서라면 총칼 앞에라도 / 달려 들마 달려 들-마”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모/이자 뭉쳐나가자 정의의 횃불을/ 높이 들고 높이들-고”

이은상 작사, 안병소 작곡 ‘학생의 날 노래’이다.

 11월 3일은 정의를 지키고자 했던 학생들의 주도로 광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제91주년을 맞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이날은 일제강점기 때 일어났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 시켜 역사적 소명 의식을 고취하고 선진조국 창조, 통일 성업에 앞장설 미래 주인공인 학생들에게 자율 역량과 애국심을 기리게 하고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알릴 목적으로 제정한 국가 기념일이다. 

 1920년대 국내 독립운동으로 손꼽히는 사건들의 중심에는 모두 학생들이 있었다. 1929. 11. 3.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일제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여 일어난 1919년 ‘3ㆍ1운동’, 1926년 ‘6ㆍ10만세 운동’과 함께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3대 항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5. 11. 2.자 아시아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재기 교수는 1930년 2월 발간된 ‘The Korean Student Bulletin’ 제8호에 당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북미 대한인 학생총연합회’학생들이 중심이 돼 모국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미국 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하면서 이 소식지에는 ‘한국에서 1919년 이후 다시 대규모 독립운동이 발생해 수천 명이 체포되고, 수백 명이 다치거나 죽었다.’며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the Morning Calm)’가 일본인들의 잔악한 총칼에 의해 ‘유혈이 낭자(bloodshed)’한 나라가 됐다고 소개했다고 전한다.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 처음으로 제정된 것은 1953. 10. 20. 제16차 임시국회에서 젊은 학도들에게 민족적 사명을 다하도록 사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국회 발의로 광주학생운동일인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였고, 1956. 12. 27.  문교부령으로 11. 23.을 “반공 학생의 날”로 이어 오다가, 1973. 3. 30.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할 목적으로 제정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약칭: 기념일 규정)에서 ‘학생의 날’을 국가기념일에서 폐지하였으나 1984. 7. 12. 제122회 임시국회에서 '학생의 날'지정 건의가 이루어져 그해 9월 19일 국무회의를 거쳐 1984. 9. 22.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중 개정령에 의해 11월 3일 ‘학생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부활하여  기념행사가 교육부 주관으로 지방교육청에서 다시 열리게 되었다.

2006. 2. 9. 열린 제258회 국회 제3차 본회의에서 ‘학생의 날 명칭변경에 관한 결의안’(대안)이 통과되면서 그해 9. 6.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일부 개정하여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 변경되었다. 2018. 11. 2.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일부 개정하여 주관부처를  교육부에서 국가보훈처(기념식)와 교육부(계기 행사)로 변경, 첫 정부 행사로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매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아 선열들이 보여주었던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꼽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중요성과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차별과 불의에 맞서 일어선 학생들의 용기와 독립정신을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시대정신으로 계승·발전 시켜 국민 화합의 계기를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올해 제91주년 학생 독립운동기념식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소재한 학생 독립운동기념탑에서 11.3(화) 오전 11시에 '대한독립,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연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59. 11. 3. 아세아영화사에서 김강윤 감독이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록영화 「이름 없는 별들」로 재현된 바 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들고 봉기한 광주학생사건을 중심으로 엮은 항일 학생 운동사를 그린 영화라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설명한다. 

광주광역시교육청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에서 2019년 6월 광주지역 초·중·고 학생 3,9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생 독립운동 역사 인식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광주학생독립운동 발생 인지도에 대하여 1929년 당시 광주고등 보통 학교(광주고보, 현재 광주제일고), 광주농업학교(현재 광주자연과학고), 전남사범학교(광주 사범, 현재 광주교육대), 광주여고보(현재 전남여고)에서 조직된 독서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학생 독립운동에 대해 초중고 학생의 45.4%는 알고 있고 54.6%는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인 11월 3일에 대해 초중고 학생들의 39.2%가 알고 있고 60.8%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결과가 나왔다. 

 광주 학생독립 운동의 전말(顚末)은 1929. 10. 30. 오후 광주~전남 나주 간 기차 통학열차 통학생인 광주중학교 후쿠다(福田) 등 3명의 일본인 남학생들이 나주역 입구에서 광주여고보 3학년생인 박기옥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것을 본 광주고보 2학년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1914.6.28. ~ 2001.3.7., 광주 학생 항일시위의 점화자로서 전국 학생운동의 발단이 되어 국민의 민족의식 고취와 항일 독립운동에 영향을 준 주동자로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어 1990 애족장 서훈,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전자 사료관)가 꾸짖었다가 언쟁을 벌이던 중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라고 말하여 이에 격분한 박준채가 그에게 달려들어 싸움이 시작되었으나 이를 본 일본인 경찰은 일본 학생의 편을 들며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박준채를 질책 구타(叱責 毆打)하고 쌍방을 돌려보내 민족적인 감정을 자극한  이후 광주 시내 분위기는 대단히 긴장되어 외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킨 도화선이 된다(1929. 12. 28. 조선일보, 동아일보). 다음날인 10. 31. 오전 등교 시 박준채와 광주고보생 3~4명들은 후쿠다가 탄 일본인 학생들의 객차에 탑승하여 후쿠다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설왕설래로 언쟁을 시작하여 다시 충돌했고, 광주고보생과 광주 중학생들의 싸움으로 번졌으나 차장이 말려 겨우 무사하였으나 이번에도 싸움을 말리던 일본인 차장 역시 한국 학생들만 혹독한 질책을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11. 3. 마침내 나주역 사건으로 학생들 간 감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인 광주 시내 한국 학생들은 일제의 차별 정책에 따른 식민지 교육에 항의하여 수업 거부 운동이나 백지 동맹, 등교 거부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며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전개하게 된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우리 민족에게는 개천절(음력 10월 3일)이었고, 일본인에게는 4대 명절의 하나로 일왕‘메이지(明治)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었고 이날을 축하하면서 광주 신사(神社)가 있는 광주공원 앞에서 ‘전남 누에고치 6만석 돌파 기념식’에 일요일이었지만 강제로 참석했던 한국인 학생들은 여학생에게 폭언한 일본인 학생을 두둔하고 한국 학생들에게 불리한 왜곡 기사를 쓴 당시 일본인 운영 언론사 광주일보(현 전일빌딩 뒤편 간호학원 근처로 추정) 등 신문사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항의 표시를 하였고 일인 학생들과 시내 각처「최초 충돌장소 광주 수기옥정(須奇屋町) 우체국 앞(현 충장로 신한은행 주변), 2차 광주역 인근(옛터 현 동부소방서 앞 인도에 옛 광주역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음.), 3차 토교(土橋, 현 대인시장 동문 입구)」에서 일본인 학생과 집단으로 큰 충돌이 벌어지고 일제에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 얘기가 퍼지면서 광주고보를 비롯해 광주농교,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광주역으로 모여들면서 양측 학생들 사이에 대규모 난투극이 발생했다. 이는 우발적인 학생들 간의 충돌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우리 민족의 불만과 식민지 차별 교육 정책에 저항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상황의 심각함을 느낀 당국은 경찰, 소방대, 교사까지 동원해 양쪽 학생을 말렸지만 이미 수십 명이 다친 뒤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모체가 된 ‘깨달아 나아가자’라는 뜻의 성진회(醒進會, 광주고등 보통 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에 의해 조선독립과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 폐지,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요구라는 강령을 갖고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는 신간회 산하에 긴밀히 연결하면서 '독서회 중앙본부'로 조직이 개편된 이후 결성된  독서회(讀書會)는 각 학교· 학년· 학급별로 조를 편성하여  민족의식 고양,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더 나아가 독립운동 실천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광주 여자 보통 학교에는 장매성이 중심이 되어 ‘소녀회(少女會)’가 조직되어 민족 운동의 이론과 실천 방안, 여성 해방 운동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런 움직임들을 보면 3․1운동 이후 광주에서 학생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식민지 노예교육에 맞서 저항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일본은 시위의 규모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해 광주시 내 중·고등학교에 휴교령까지 내리고 경찰은 4일 오후부터 11일까지 주동자 검거를 시작하여 70여 명 학생을 구속하고 그중 62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일제는 즉각 보도통제를 시행하는 등 언론 보도를 금지했으나 학생들의 시위 소식은 신간회에 실린 광주학생운동 호외(출처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전해졌고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 항일 운동은 이듬해 3월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뿐만 아니라 연해주, 만주, 오사카 등 해외지역으로도 확대되어 수만 명이 참가하게 됨으로써, 3․1운동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19. 2. 24. 서울시교육청 교육 연구정보원이 발간한 '서울지역 학생 독립운동 현황과 공유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당시 시위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1929년 12월 초를 기점으로 불붙은 서울 시내 각 학교와 요소에 광주 학생들을 격려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였는데, 서울에서의 그해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시위와 동맹휴학에 참여한 서울 학생은 모두 1만 2천여 명에 달했다(1930. 1. 17. 동아일보). 

이처럼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파급되어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 역사 넷에 따르면, 전국의 320개 이상의 학교(일제 총독부의 공식적인 기록은 처음에는 194개, 2006년 광주광역시교육청 학생 독립운동 기초자료 발굴 팀 등에 의해 350여 개)에서  5만 4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당시 전국적으로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재학한 학생 수가 8만 9천여 명이었으니 60% 정도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남.) 했다. 이렇게 들불처럼 퍼진  '학생 독립운동'으로 받은 일제의 탄압은 학생들의 피해도 커서 전국에서 검거 1,600여 명(광주 170여 명 실형),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강제전학 298명, 그리고 광주사범학교는 폐교를 당했다.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제91주년을 맞는다.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에는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오직 조국 광복의 그 날을 꿈꾸며 자신을 희생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묻혀 있거나 지금은 국립현충원 등으로 이장된 분도 있다. 심한 고문에도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던 소녀 유관순 등 대표적인 학생 독립 운동가와 광주의 학생 시위 운동을 전국적 항일 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한용운 등 독립운동가, 유명 인사를 찾아 이들의 삶을 후대에 깊은 감동과 큰 울림을 전하고 국내외에서 일제 침탈에 항거한 독립투사의 삶을 재조명해 보는 노력을 기울여 보면 어떨까.

  고종의 승하와 2·8 독립 선언 이후 이화학당에 다니던 16세의 어린 소녀 유관순, 그가 1919년 3ㆍ1 독립운동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로서 독립 만세 대열에서 선봉에 섰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혀 투옥되어 항일 투쟁 끝에 일경의 지독한 고문으로 처참하게 목숨을 잃는다. 

당시 신간회는 법정투쟁까지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광주 학생 항쟁 운동의 진상조사와 학생들 석방을 교섭하기 위하여 중앙 본부의 간부이며 변호사인 김병로와 허헌 등 진상조사단을 광주에 특파하였다. 그리고  1929.12.10. 권동진(3‧1 운동 시 33인 중 1인), 동아일보사장 송진우,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 등과 회합하여 광주학생운동의 진상과 잔악한 일제의 식민정책을 규탄하기 위해 연설회 광고문을 인쇄 살포하고 12. 13.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를 통해 청중을 모아 한용운(신간회 경성지회장)과 주요한을 연사에 포함하여 대중연설회를 갖고 이어서 시위를 하기로 했으나 이 계획을 탐지한 일제 경찰은 1929. 12. 13. 허헌, 한용운 등 신간회 임원 등 종교 사회 각 방면, 중요 인물 검거하고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여 경성지법 검사국으로 송치했고, 이들 중 한용운, 권동진, 주요한 등은 1930. 1. 6.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1929. 12. 14. 과 1930. 1. 1. 동아일보,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일제 침략 하 36년사).

만해 한용운은 광주 학생의 항일 운동의 영향을 준 신간회 회원으로서 1929년 광주 항일 학생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확산 시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민중 운동의 전국 확대에 노력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본에 저항하며 나라를 되찾는 일에 힘을 썼다.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전정 터에 끌고 가는 등의 강제적인 징발을 저지르자 그는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일본과 타협하지 않은 꼿꼿한 태도는 많은 독립운동가의 모범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 되찾기 활동을 이어갔으나 아쉽게도 1944년 우리나라 광복을 눈앞에 두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소파 방정환은 일제강점기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로 항일 학생 운동의 근거지이며 광주 학생․청년 계몽운동의 요람인 흥학관의 초청강연회 강사로 송진우, 안재홍 등과 자주 참여하였다.  

고하 송진우 그는 전남 담양이 낳은 우리나라 최고의 애국지사요 민족지도자로 일컬어진다. 그의 묘소는 처음 망우리 공원에 자리를 잡았으나 1966. 11. 11. 서울 양천구 신정동 지향산 기슭에 천장하고, 다시 1988. 5. 3. 서울 국립묘지로 안치했다. 2016. 7. 13. 광주지방보훈청은 그해 7월의 '우리 고장 현충 시설'로 전남 담양군 금성면에 위치한 송진우 고택을 선정했다. 그는 국내 3·1운동을 기획했고 일제로부터 3·1운동 주도 인물 48인으로 분류되어 3·1운동 직후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3, 6대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며 1936년 8월 마라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광주광역시는 지난 2019. 12. 17.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독립운동 제90주년을 맞아 잊혀가는 광주 독립운동 사적지를 기억하고 후손에게 역사 현장을 알리기 위하여 흥학관 터 등 5곳에 사적지 표석을 설치했다. 시는 관련 단체, 전문가, 교수 등 9명으로 ‘사적지 표석 설치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보훈처 ‘국내 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등 자료를 토대로 표석 설치 대상과 디자인을 확정하고, 문안 작성, 문안 감수(국립국어원) 등 6차례 위원회 회의를 거쳤다고 밝혔다. 

 광주 독립운동 사적지 표석이 설치된 곳은 △흥학관 터(사회문화 운동 중심지로 야학 활동, 강연회, 신간회 광주지부․광주청년회 등 각종 단체 사무실 등으로 사용된 장소), △김기권 문방구점․ 장재성 빵집(금남로 근린공원, 광주학생독립운동 거점으로 독서회 회원들의 비밀모임 장소) △ 옛 광주지방재판소 터(현 SK 건물, 한 말의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재판을 받은 장소) △ 옛 광주감옥 터(한 말 의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장소) △ 옛 숭일학교 만세 모의 장소(숭일학교 교사와 학생 등 100여 명이 3․1운동을 모의하고 준비한  장소)다.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인 광주고등 보통 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 역사관이 만들어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체적인 과정을 확인할 수 있고, 1954년 세워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에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광주여자고등 보통 학교(현재 전남여자고등학교)에 남아있는 옛 건물은 1928년 3월 건축한 건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남여고에 있는‘광주학생독립운동 여 학도기념비’는 1959년에 만들어져 당시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 있다. 광주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는 임동에서 1976년 북구 오치동으로 이전하였다. 학교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역사관이 만들어져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육대학교)는 현재 중앙도서관 위치에 있었으나 이후 풍향동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교정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당시의 항일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청소년 그대들이 있어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 1990. 5. 12. 처음 선포되어 1998. 10. 22. 새로 개정된 청소년헌장(靑少年憲章)의 울림, “청소년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 청소년은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권리와 시민으로서 미래를 열어갈 권리를 가진다. 청소년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활동하는 삶의 주체로서 자율과 참여의 기회를 누린다. 청소년은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며 정의로운 공동체의 성원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간다.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국가는 위의 정신에 따라 청소년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청소년 스스로 행복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여건과 환경을 조성한다.”라고 청소년이 독립된 인격체로 격상시키고 그에 상응한 기본적인 권리와 청소년의 책임을 담았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뿌리가 되는 기념일로써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희생당했던 수많은 학생의 넋을 기리고 그 순결하고 숭고한 뜻을 이어받는 계기가 되고 있다. 11월 3일, 제91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당시 학생들의 숭고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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