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랑과 고랑」
귀연貴緣 홍순철
달음박질친다.
너머 너머 달리다 보면
뒹굴뒹굴 흙더미가 무너진다.
새싹이 돋는다.
들풀도 잡풀도 자란다.
솎아낸 잡풀들이 갸우뚱한다.
나도 생명이라고 아우성친다.
어느새 들판이다.
모양은 처음 모습 아니다.
알알이 들어찬 결실이 보인다.
※ 이랑은 논이나 밭을 갈아 골을 타서 두두룩하게 흙을 쌓아 만든 곳. 물갈이에는 두 거웃이 한 두둑이고 마른갈이나 밭에서는 네 거웃이 한 두둑이다.
* 고랑은 두둑한 땅과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을 ‘이랑’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 고랑도 이랑 될 날 있다. 몹시 고생하는 삶도 좋은 운수가 터질 날이 있다는 말이다.
「로봇청소기」
귀연貴緣 홍순철
사위가 사다 놓은 어색한 로봇청소기
둥그렇고 작은 것이 제 기능이나 하련지
가족 모두 반신반의 지켜보면 알겠지
스스로 충전하고 집안 곳곳 둘러보며
꼼꼼히도 청소한다 기특하군 제법이야
뒷짐지고 따라가며 흐뭇하게 칭찬 일색
며칠째 침대 아래 여기저기 들락날락
잊었던 물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희뿌옇던 기억이 새록새록 돌아왔다
벗어놓은 양말 한 짝 이게 여기 있었다니
휘갈겨 쓴 메모지 그때 정신없이 바빴었지
언제부터 있었냐는듯 말끔해진 구석구석
문득 스쳐가는 엉뚱하고도 씁쓸한 생각
내 머릿속 걱정 근심 내 몸속에 잔병들
매일같이 비워주는 청소기가 있었다면
※ 새 시대의 변화하는 청소기를 보면서 처음에는 ‘로봇’이라는 자체에 어색함을 느끼지만, 과거의 추억들을 끌어오면서 친근감으로 바뀌고 나 자신도 어려운 부분을 깔끔히 비워주는 청소기의 도움을 받고픈 마음을 표현하였다.
「시간의 흐름」
귀연貴緣 홍순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 망설임 없이 ‘겨울’
투명한 듯 팽팽하게 날 선 칼바람도 좋은걸
지금은 제일 원하는 계절 따뜻한 ‘봄’
찬바람 혹여 스칠까 꽁꽁 싸매기 바쁜 나
여행이 좋아 미지의 세계로
콜럼버스 저리가라 튼실 체력 도전정신
지금은 상상조차 피로 부담 언제 갔다 언제 오지
티브이 속 세계여행 즐겨찾기 하는 나
나 오늘 꽤 괜찮은 걸 나 혹시 천재일까
시선 즐기는 주인공 근거 없는 자신감
지금은 이리저리 둘러봐도 뭔가 칙칙
머릿속은 상습 정체 구간
때론 조용하게 때론 편안하게
군중 속 1인이 되고싶은 나
가끔 눈에 띄는 흰 머리카락 절대 용서 못해
남들이 혹여 볼까 부지런한 외모 가꾸기
지금은 검은 머리카락 말 그대로 힘든 보물찾기
염색도 귀찮아 무심하게 쓸어 넘기는 나
대책없이 쏟아지는 잠이 원망스러워
애써 버티기 좀 더 일하자 좀 더 놀아보자
지금은 잠이 보약 꿀잠은 큰 복
밤새 눈 껌벅껌벅 잠님이 오시려나 기다리는 나
이것좀 해 저것좀 해 일할 사람 나 뿐이었나
여기저기 밀려드는 일들 피하고싶어 안절부절
지금은 조심히 부탁해오는 작은 일거리
살짝 귀찮지만 소중하게 느껴지는 나
유행따라 간다 질리면 새것으로
유난히도 깔끔하고 변덕스러운 정리 왕
지금은 남겨두면 쓸모있지 소중한 추억이지
이런저런 이유 붙여 쟁여두는 만물상
내일은 뭐 할까 내년엔 어떻게 할까
앞으로 닥쳐올 계획 세우기에 한창
지금은 과거로 향하는 나의 기억 시계
어제는 뭐 했었지 작년엔 그랬었지
지난날 되새김에 익숙해진 나
나이 들어봐라 너는 안 늙을줄 아니
잔소리에 코웃음 치던 시절
내 시간은 더디 갈줄 알았지
나만은 다를줄 알았지
나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 시간의 흐름
이제는 뭔가 알것 같다 입가에 번진 옅은 미소
※ 젊은 시절 자신감 넘치고 활기 있으며 남의 시선을 즐기는 모습은 우리네 젊은이들의 일상이다.
*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고방식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듯 공감할 여지를 두었다.
난 시를 쓰면서 늘 함께하는 조그만 즐거움도 시 속에는 귀한 의미가 있기에 하나의 글 소재로 키워진다.
내가 만나는 대상은 나에게는 귀하고 귀한 존재이다. 그 만남은 늘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