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2-09-28 19:05 (수)
실시간
독립운동가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상태바
독립운동가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 교육3.0뉴스
  • 승인 2022.08.19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꿈꾼 대한민국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여러분은 우리가 지킨 대한민국을 소중히 여기고 있나요. 여러분은 우리가 꿈꾼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고 있나요.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대한민국을 기억해 주세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은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해야 한다.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라 할 것이다.」라는 말이 독립기념관 벽면에 새겨져 있다.

독립운동가 한용운, 강우규, 이육사, 베델, 김마리아, 김좌진, 방정환, 문일평의 꿈은 무엇인가.
홍순철 「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장, 세종로국정포럼위원장, 좋은교육협의회장, 공교육 3.0 뉴스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주간, 한국문예작가회 지도위원(수필가 · 시인 귀연 貴緣), 현(現)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 (前)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세계 도덕 재무장(MRA / IC) 서울 총회장, 신현고등학교 교장 정년퇴직」
홍순철 「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장, 세종로국정포럼위원장, 좋은교육협의회장, 공교육 3.0 뉴스 칼럼니스트, 대한교육신문 논설주간, 한국문예작가회 지도위원(수필가 · 시인 귀연 貴緣), 현(現)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 (前)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세계 도덕 재무장(MRA / IC) 서울 총회장, 신현고등학교 교장 정년퇴직」

 ● 어린이의 영원한 벗 강소천의 동요 「태극기」는  많은  어린이들에게 불렸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입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펄럭입니다.” 강소천은 지금 망우역사문화공원 바로 곁에 잠들어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꿈꾼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고 있나요. 100년 전 독립운동가가 꿈꾼 대한민국을 기억해 주세요.

 ▲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독립운동가이며 근대적 시인이요,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 만해 한용운(1879. 8. 29.~1944. 6. 29.」이 묻혀 있다. 그의 연보비 전면에는 “萬海 한용운 선생(1879~1944, 독립운동가, 시인)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써, 이 같은 본성은 남아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 중에서”라고 쓰여 있다.

 독립기념관에도 그의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해야 한다.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라 할 것이다.」는 말이 기념관 벽면에 걸려 있다. 

 한용운은 1926년에 발간된 그의 첫 시집 [님의 침묵]에 실린 시  「꿈이라면」에서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 무심(無心)의 광명(光明)도 꿈입니다 /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라고 읊는다. 

 기왕에 모든 것이 모두 꿈만 같은 미망(迷妄)의 세계라면, 차라리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다는 인간적 호소가 마음에 와 닿는다. 일제강점기 이 차가운 시대에 사랑마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황량(荒凉)하고 쓸쓸할까.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다. 그해 ‘국권피탈’를 당하자 중국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의 훈련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독립 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했다. 1918년 불교 포교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월간 「유심(惟心)」을 간행했다. 그의 문학은 삶과 행적을 살펴보건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과도 같은 당대의 한계로 인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한다 「만해기념관 (manhae.or.kr)」.

△ 한용운의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 한용운의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2019. 2. 26.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공개한 만해 한용운이 1919년 옥중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친필 초고본을 공개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고 시작하는 이 글은 홍성의 만해 한용운 생가지 민족시비공원 안에 한용운의 어록비에 새겨져 있다. 

 만해 한용운의 독립 의지와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알 수 있는 글귀이다. 이 글을 통해 조선 독립선언의 동기와 이유를 밝히면서 일본의 군국주의·침략주의를 비판했다.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는 만해 한용운이 1919년 7월 10일 옥중에서 일인 검사 총장의 요구에 의하여 작성한 옥중 독립 선언문이다. 옥중에서 아무 참고서적 하나 없이 53장에 걸친 조선독립에 대한 선언을 남긴 것이다.
 ●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사이버외교관 반크 (prkorea.com)는 2018. 12. 12.,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강우규, 이육사, 베델, 김마리아, 김좌진, 방정환의 꿈을 소개하는 영상 ‘우리가 꿈꾼 대한민국을 기억하라’는 제목의 10분 30초 분량의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 「https://youtu.be/RD39UN6JVXU」에 올렸다.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 앞 태극기를 들고 계단에 선 독립운동가들,  꿈에 그리던 광복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 조선 총독에 폭탄을 던진 백발의 독립운동가 강우규(1855. 7. 14.~1920. 11. 29.) 의 꿈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었다.

 “젊은이들이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쾌활하고 용감하게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가라.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1920년 11월 강우규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1945년 11월 3일 중국 총칭의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계단에서 사진을 찍었다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사이버 외교관 반크」 유튜브에서 캡처함.
△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1945년 11월 3일 중국 총칭의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계단에서 사진을 찍었다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사이버 외교관 반크」 유튜브에서 캡처함.

 강우규는 1919년 9월 2일 조선총독부(일본)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 차 서울역 광장(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해 마차에 오를 때,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수행원·일본 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 거사는 외신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한국 젊은이들의 독립을 향한 꿈을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그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돼 있고 옛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서울시는 2019년부터 강우규 의사를 기리기 위해 서울역 인근의 서울역버스환승센터(02-007) 정류소 명칭을 ‘서울역버스환승센터. 강우규 의거 터’로 병기하고 있다.

 강우규는 1910년 일본 제국주의에 조선이 강제 식민지화되자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강우규는 왜 식민지 조선의 최고 지도자인 일본인 총독을 처단하고자 했을까.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꿔 독립 의지를 서서히 낮추고 한국인 친일파를 적극적으로 키워 한국인들을 분열시키려 했다. 이에 강우규는 조선에 새로 부임하는 일본인 총독을 처단해 한국인을 일제의 정신적 노예로 만드는 문화정책 실행을 막고자 결심했다 「공훈전자사료관 (mpva.go.kr)」.

 이 영상에서,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강우규가 되어 쾌활하고 용감하게 대한민국의 꿈을 완성해 달라고 한다. 

 ▲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항일 시인 이육사 (본명 이원록, 1904. 4. 4.~1944. 1. 16.)의 꿈은  감옥에서 모진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더 이상 총으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해 서른 살이 넘어 총 대신 펜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길을 선택 한국인에게 좌절 속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그는 지금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이육사문학관 뒷산에 묻혀 있다.

 조국을 향한 마지막 꿈이 담긴 그의 시 「광야」에서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읊는다.

 그가 감옥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기다리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1945년 광복이 되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모든 한국인에게 찾아왔다. 그는 독립운동으로 인해 수감되었을 당시 자신의 수인번호 ‘264’를 따 '육사‘를 자신의 호로 정할 만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위대한 용기를 지닌 독립운동가였다.

 이 영상에서,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이육사가 되어 그가 기다렸던 위대한 대한민국을 완성해 달라고 한다. 

 ▲ 언론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 11. 3.~1909. 5. 1.)의 꿈은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라!“라고 언론의 중요성에 대해 유언을 남긴다.

 “내 말 백 마디보다 신문의 한마디가 한국인들을 더 격동시킨다.“ 이 말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두렵게 할 만큼 당시 한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신문을 발행한 사람은 언론인 베델이었다. 

 베델은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에 격분하여 “대한매일신보”와 영자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한 영국출신 언론인이다. 

 그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증거가 되는 고종 밀서 및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을 기사로 소개해 한국인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 일본의 모함으로 여러 재판을 받으며 건강이 악화한 베델은 1909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장례식에 수천 명이 모일만큼 한국인은 베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yanghwajin.net)」의 베델 묘비문에는  “그는 2000만 한민족의 의기를 고무하며 일제에 목숨과 운명을 걸고 싸우기를 여섯 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해 이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영상에서,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베델이 되어 언론인 베델이 꿈꾸었던 위대한 대한민국을 완성해 달라고 한다. 

 ▲ 교육자 김마리아(1892. 6. 18.~1944. 3. 13.)의 꿈은 “리더십을 키우며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꿈을 성취해나가라!” 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기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어록비가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에는 ‘혁명 여걸’ 김마리아의 위패가 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재일 유학생의 독립선언에 참여한 한 여성은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 청년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성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낀다. 이 여성은 자신은 대한 독립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독립운동에 힘쓴 김마리아이다

 그녀는 2·8 독립선언 참가 후 귀국해 전국 여성들의 3·1 운동 참여를 독려하다 감옥에 갇히게 된다. 출옥 후 전국 15개 지부 2,000여 명의 여성 회원이 활동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등 여성 지도자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하다며 192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28년 미국 유학 중인 여학생들과 ‘재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 미국에 일제의 조선 식민 통치의 부당함을 고발했다. 

 1933년 귀국해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 청년 대상 독립 운동과 교육활동에 전념한다. 조국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녀는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 영상에서,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김마리아가 되어 교육가 김마리아가 꿈꾸었던 위대한 대한민국을 완성해 달라고 한다. 

 ▲ 한국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청산리 대첩의 군인 김좌진(1889. 11. 24.~1930. 1. 24.)의 꿈은 신분 차별 없는 조국의 미래를 꿈꾸고, 이를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또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1930년 1월 24일 40세의 김좌진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 내가 죽어야 하니 그게 한스럽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의 묘역은 충청남도 보령시 원안송동길 264-1(청소면)에 있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김좌진 북로 정서 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일본 정예부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에서 대승한 위대한 한국의 독립운동이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식민지가 되자 김좌진은 독립군 사관생도 양성을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투옥되었다. 출옥 후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하며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대항하는 다양한 전투를 수행했다

 이 영상에서,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김좌진이 되어 그가 만들고자 했던 위대한 대한민국의 꿈을 완성해 달라고 한다. 

 ▲ 일제강점기 세계 최초의 어린이날을 대한민국에서 만든 아동문학가 방정환(1899.11.9.~1931.7.23.)의 꿈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투자하라.”였다. 그가 꿈꿨던 독립된 조국의 주인공은 바로 어린이이었다. 그는 일제의 노예가 아닌 장차 독립된 조국의 주인공이 될 아이들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아동 운동을 펼쳐 일제에 대항했다. 그는 지금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혀 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던 제국주의 시절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은 가장 취약하고 천대받는 존재였던 아동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 제국주의 민족말살정책,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모든 역사, 문화, 언어, 종교 등을 파괴해 일본인의 노예로 양성했다. 

 그는 일제의 노예가 아닌 장차 독립된 조국의 주인공이 될 아이들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아동 운동을 펼쳐 일제에 대항했다.  당시 아동을 비하하는 호칭에 안타까움을 느낀 방정환은 아동을 어른과 같은 인격체로 존중하기 위해 ‘어린이’라는 존칭어를 만들고 이를 딴 한국 최초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 동화 <사랑의 선물> 등을 집필하는 등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전개한다. 

  1922년 5월 1일 세계 최초의 <어린이날>을 제정했으며 <어린이 인권 선언>을 통해 어린이들이 인간으로 대우받고 조국 미래의 주인공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이 영상에서,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방정환이 되어, 그가 꿈꿨던 대한민국의 꿈을 완성해 달라고 한다. 

 반크는 영상에서 독립운동가들의 꿈을 일일이 소개한 뒤 말미에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가 되어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대한민국의 꿈을 완성해 달라.”고 호소한다.

 ▲ 절망과 고통의 일제강점기하에서도 결코 독립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조선의 문화와 조선의 마음에 주목한 국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호암 문일평(1888.5.15.~1939.4.3.)은 지금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 에 묻혀 있다.

 그는 짓밟히고 뒤틀린 우리 민족의 문화혼, 한국 혼을 되찾아 세계 인류문화의 진보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원대한 과제를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한 언론인이며 역사가였다. 

 그는 여러 학교에서 한국사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몇 년간은 신문사에서 역사 연구와 그 지식을 토대로 사화와 사론을 연재하던 논설위원 및 편집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3월 23일 문일평은 ‘독립요구서’를 작성해 조선총독부에 전달한다.

 “오늘 세계 대세는 이미 무단적 실력은 가고 정의 인도가 온 것이 아닌가. 이미 압박적 역리(逆理)가 가고 평화적 정도(正道)가 흥한 것이 아닌가. 민족이 이미 무력으로써  자립치 아니하고 인도 정의로써 자존 자보(自存自保)케 된 이상은 오늘 우리의 독립선언이 무슨 모순이 있으며 무슨 패리(悖理)될 것이 있으리오. 동양 평화가 조선 독립으로 더욱 확고한 것이 아닌가.”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힌 독립운동가 호암 문일평의 연보비에는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公理: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진리나 도리]요 철칙이다.” 애원서(哀願書)’ 중에서“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꿈에 100년 전 독립운동가의 꿈을 더해 보세요.  

 100년 전 독립운동가의 꿈을 이어 21세기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글로벌 독립운동가는 바로 바른 사회 정민(正民)으로 배려와 위함과 의리지변(義利之辨)으로 사회공헌에 앞장서는 대한민국 청년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